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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할아버지카페 딸 Oct 03. 2022

낯선 구원자

할아버지, 진정한 바리스타 되다. 

할아버지카페가 가게를 열고 맞게 되는 첫 번째 가을로 이야기는 거슬러 올라갑니다. 


늦은 밤이었습니다. 단풍철이다 보니 늦게까지 손님이 들어, 우리 부부의 퇴근이 많이 늦었습니다. 보통은 우리 딸 사장이 뒷마무리를 했을 테지만, 그날은 중요한 약속이 잡혀서 우리 부부가 느직느직 가게를 치우고 있었지요. 그리고 가게 안으로 낯선 사내 하나가 들어왔습니다. 우리처럼 아주 노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나이를 많이 먹은 남자였습니다. 금방이라도 바람에 날아갈 듯 깡마른 체구인데, 안경 너머의 눈동자만은 유난스레 반짝거렸습니다. 그는 도선사에 올라갔다 내려오는 길이라며, 커피 한잔을 주문했습니다. 아직 커피 머신의 스위치를 내리기 전이었고, 저는 한잔이라도 더 팔면 좋지 하는 마음으로 그의 주문을 받아들였습니다.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킨 남자는 우리 부부를 한참 동안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물었습니다. 예전에, 커피 장사를 해 본 적이 있으세요? 물론, 아니었지요. 그리고 그 무렵 손님들에게 늘 그랬듯이, 저는 퍽 주책없이 가게를 차려준 아이들의 자랑을 한참 동안 늘어놓았습니다. 그것도 가게를 차릴 때 가장 많은 돈을 투자한 우리 아들에 대해서요. 꼭 가게를 차려주지 않았더라도, 아들 자랑은 하나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우리 아들은 누구나 부러워하는 엄친아의 대표적 인물이었으니까요. 남자는 내 이야기를 잠자코 다 듣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르신, 혹시 커피 배워보실 생각 없으세요? 


사실, 그때까지도 저는 물장사에 필요한 기술만 있으면 되었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나이에 제가 무엇을 더 배우겠습니까. 남자는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퍽 진지하게 말을 이어갔습니다. 


카페 장사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여도 참 어려운 장사입니다. 그래서 잘 모르고 덤비면 십중팔구 망하기 쉽지요. 어르신들이나 자제분들도 꽤 많은 돈을 투자해서 가게를 차렸을 텐데요. 이제라도 마음을 굳게 다잡고 커피를 배우셨으면 좋겠습니다.      


솔직히, 상황이 이쯤 되고 보니, 저는 낯선 이 남자가 아주 다르게 보였습니다. 늦은 시간 우리 가게를 찾아온 고마운 손님이 아니라, 물정 모르는 늙은이를 후려서 한몫 챙기려는 사기꾼 정도로 보였지요. 어서 빨리 남자를 달래서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남자는 우리 부부가 경계의 눈초리를 보이자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우리 부부와 이 낯선 남자의 만남은 이렇게 끝이 나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남자는 다음날 다시 할아버지카페를 찾았습니다. 알고 보니, 남자는 의정부에서 오래된 카페를 운영하는 남자였습니다. 게다가 카페 사업도 제법 성공해서 살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제야 저 또한 조금은 마음의 경계를 늦출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커피를 진지하게 배워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남자는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가게를 찾아와 우리 부부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자신이 커피를 배우게 된 이유는 물론이고, 우리가 몰랐던 커피의 종류와 역사, 그 밖에 재미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그 남자는 뜻밖에도 저와 같은 취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즈음 한창 열을 올리며 배웠던 풍수지리와 동양철학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가게가 마무리될 때쯤 찾아오는 이 남자와 주거니 받거니 꽤 여러 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언젠가부터는 그 사람이 은근히 기다려지더군요. 

    

그리고 결국, 저는 그 낯선 남자에게 코를 꿰여서 진정한 바리스타의 길에 들어서고야 말았습니다. 그것도 코를 꿰는 줄도 모르고 꿰었지 뭡니까. 가랑비에 옷이 젖는다고들 하지요. 하루가 멀다고 할아버지카페에 찾아와서 하나둘 들려주는 커피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어느 순간 호기심이 발동하더군요. 저도 모르게 커피에 대한 책을 읽고,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결국에는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작은 통돌이 로스터기를 사는 데까지 이르렀지요.    

  

바로, 우리가 의정부 고사장이라고 부르는 양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딸 사장은 때때로 의정부 고사장을 장난 삼아 부를 때, ‘할아버지 바리스타의 정신적인 어머니’라고 합니다. 삐쩍 마른 영감이 우리 엄마라니, 생각만 해도 몸이 근질근질합니다만, 그래도 그 양반이 일 년 넘게 우리 가게를 오가며 커피를 가르쳐 준 정성은 보통 사람이 마음을 내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전쟁에 인연이 있지 않고서야,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야말로 할아버지 카페에 하늘이 내려준 은혜이지요.  

    

저는 언젠가, 의정부 고 사장에게 왜 그렇게 반기지도 않는 가게에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왔는지를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깡마른 체격과는 달리 목소리가 몹시도 우렁찹니다. 그래서 가뜩이나 목소리가 큰 저와 이야기를 할 때면, 온 동네가 떠나갈 듯하지요. 그가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우리 집 식구들을 처음 만났을 때 이야기를 하면 이렇습니다.      


아, 그게요. 간판이 ‘할아버지카페’ 지 뭡니까. 그래서 가게 안을 들여다보니 연세도 지긋하신 두 어르신이 장사하고 계시더라고요. 정말, 할아버지 카페잖아요. 그래서 생각했지요.      


아! 그냥 두면 저 양반들 일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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