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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신웅 May 01. 2022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셀린 시아마 감독. ★★★★★

최근 뛰어난 작품들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셀린 시아마 감독의 대표작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이 영화는 성소수자로 상징되는 약자들이 사회적 억압을 자유와 평등을 향한 희망과 실천으로 극복하는 과정의 숭고함을 담은 작품이다. 


영화는 두 주인공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에 따라 전개된다. 처음에는 마리안느가 초상화 완성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몰래 엘로이즈를 바라보지만, 점점 엘로이즈 또한 마리안느를 몰래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러다 마침내 두 사람은 서로를 솔직하게 바라보게 된다.

앨로이즈는 담배를 빌린다는 핑계로 마리안느를 찾아오고, 마리안느가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사랑을 느끼게 된다. 

영화는 책, 피아노, 담배, 카드 등 소품을 활용해 복선을 적절하게 배치하면서 형식적으로 완벽한 구성을 갖춘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엘로이즈가 자신의 첫 번째 초상화를 보면서 감상평을 하는 장면이었다. 내용과 형식 두 측면에 있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이라고 생각된다. 

그림 속에 미소 짓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엘로이즈는 “애정의 시선이 담기지 않은 그림은 거짓”이라고 마리안느에게 말한다. 

마리안느는 그림에는 규칙과 관습, 이념이 있다며 엘로이즈의 말을 반박한다. 그러나 그 규칙과 관습, 이념은 거짓이라는 것을 마리안느도 알고 있다. 그런 마리안느에게 엘로이즈는 관습과 규범 - 당연히 소수의 지배 권력이 강제적으로 수용하길 요구하는 것들 - 을 거부해야 생명력을 얻고 존재감을 얻을 수 있다고 재반박한다. 

그러자 기존 관습을 당연히 받아들였던 마리안느는 존재감이란 진실되지 않은 순간들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그동안 여성을 억압했던 제도 속에서 살아온 마리안느가 느꼈을 감정일 것이다. 

마리안느의 말을 들은 엘로이즈는 다시 그것을 깨뜨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것을 깨뜨려야 진정한 사랑을 얻을 수 있다고.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빠르게 진전된다. 둘은 5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관습과 규범을 깨뜨리고, 진실한 순간들로 이뤄진 삶을 살며 자신의 진정한 존재감을 확인한다. 



5일 동안 두 사람은 하녀인 소피와도 함께 하며 진정한 평등이 주는 안락함을 누리게 된다. 그리고 낙태라는 행위를 통해 삶의 객체에서 주체로 거듭나는 경험도 함께 공유한다. 

또한 세 사람은 오르페우스 신화를 함께 읽는다. 이는 영화에서 매우 중요한 복선이자 미래에 대한 암시가 된다. 아직 두 사람의 연대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기에 두 사람은 에우메니데스와 에우리디케가 된다. 그리고 엘로이즈는 결혼이라는 무덤으로 가는 길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들은 이 가혹한 현실 속에서 현실을 이겨낼 수 있는 무기를 서로 발견한다. 그건 바로 ‘기억’이다. 마지막으로 사랑을 나눈 두 사람은 말한다. 


후회하지 말고 기억해요.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그렇게 기억을 통해 자신의 사랑을 지켜낸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본 후, 자연스럽게 ‘브로크백 마운틴’과 ‘캐롤’이 생각났다. 모두 표면적으로는 동성애를 주요 소재로 사용했지만, 보다 근본적인 것을 관객들에게 전달해주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특정 시대 및 지역의 이데올로기와 관습 등에 따라 억압당했던 소수자들이 연대와 사랑으로 이를 극복해간다는 점이다. 여기서 사랑은 그저 두 사람 간의 사랑으로 의미를 축소할 수 없는, 인간이 인간과 나눌 수 있는 가장 크고 고귀한 사랑이라고 표현해야 한다. 


사회제도를 변혁하거나 혁명을 통해 권력을 잡는 것만이 완전한 승리는 아니다. 억압과 차별 속에서도 오직 자신을 이해하고 믿어주는 이와 꿋꿋이 버티며 살아가는 것, 그리고 마침내 살아내는 것 또한 거룩한 승리다. 바로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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