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지리산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툭, 하고 기척 없이 지섭의 눈두덩에 떨어진 빗방울은 이내 나뭇잎을 투둑 투둑, 때려댔다. 헤드랜턴 빛을 사정없이 할퀴는 모양새를 보니 제법 내릴 것 같았다. 우의(雨衣)도 없이 바람막이 점퍼 하나만으로 앞으로 내릴 빗줄기를 감당할 수 있을지 살짝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걱정한들 달라질 것도 없었다. 휴게소 앞 주차장에서 잠시 엉거주춤 서 있다 결심한 듯 적막 속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비구름 아래 겹겹이 펼쳐진 능선은 어둠의 농도로 간신히 가늠할 수 있었다. 난생처음 어둠에 잠긴 산속으로 들어가는 만큼 작은 소리에도 흠칫하며 헤드랜턴으로 주위를 확인했다. 주뼛주뼛 걷는 동안 스멀스멀 밀려드는 불안함을 몰아내기 위해 쓸데없는 생각에 집중했다.
‘대피소 가면 라면에 뭘 넣지? 참치는 부서지니까 스팸이 낫겠지? 소주는 팩 하나로 충분하나?’
이런 생각에 골몰하며 40여 분 정도 등산로를 걸으니 100여 미터 앞에서 희미한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둠 저편에 박혀있는 불빛은 겨우 쌀알만 한 크기였다. 하지만 그 작은 불빛 한 점에 눅눅한 불안은 연기처럼 흩어졌다. 걸음을 재촉해 불빛 쪽으로 좀 더 다가가자 인기척이 들려왔고, 이어 공중화장실의 지린내를 맡게 되자 안도감이 온몸에 번졌다.
새벽 5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지만 노고단대피소는 지리산 종주에 앞서 배를 채우는 이들로 분주했다. 취사실에서 풍기는 김치찌개와 고소한 돼지기름 냄새가 사정없이 몸속으로 달려들었다. 지섭은 입맛을 다시며 대피소 입구 처마 밑으로 가 비에 젖은 배낭을 땅에 내려놨다. 배낭에서 수건을 꺼내 몸에 묻은 물기를 대충 털어내며 대피소에서 취사실로, 취사실에서 화장실로, 화장실에서 대피소로 분주하게 들락거리는 이들을 지켜봤다. 화려한 등산복에 우의를 걸친 중년의 무리는 산행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잠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다 편의점에서 사 온 삼각김밥 두 개를 배낭에서 꺼냈다. 조심스레 포장지를 벗겨 한 입 베어 문 후 밥알을 꾸역꾸역 몸속으로 밀어 넣으며 천천히 날이 새는 모습을 지켜봤다.
30여 분 정도 그 자리를 지키자 얼추 앞에 펼쳐진 풍경을 식별할 수 있을 만큼 날이 밝았다. 여명 속에서 들춰낸 풍경이라야 산맥을 뒤덮은 우중충한 회색 비구름이 전부였다. 그래도 비구름을 보니 이제는 헤드랜턴 불빛에 의지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지섭은 중요한 의식을 치르듯 천천히 헤드랜턴을 배낭 깊숙한 곳에 집어넣고 묵직한 배낭을 들어 어깨에 둘러멨다. 다음으로 가슴과 허리의 배낭끈을 신중히 조절한 후,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오른발을 뗐다.
노고단으로 향하는 등산로 입구 표시판에 새겨진 ‘천왕봉 25.9㎞’라는 글귀가 눈에 선명히 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