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절망이 가진 비열함을 비웃어주며 사는 거야 여기에
노고단을 지나면서부터 노래 가사 한 구절이 머릿속을 맴돌기 시작했다. 시나브로 날은 밝았으나 산맥을 짓누르는 비구름 때문에 경치를 감상하며 걷는 일은 일찌감치 포기해야 했다. 눈동자는 그저 발을 내디딜 땅에만 고정됐다. 미끄럽고 좁은 등산로 옆으로 도열 한 볏과의 식물들만이 눈앞을 스쳤다.
한 시간 남짓 걸었을 뿐인데 비좁고 질척거리는 길을 따라 걷는 일이 벌써 지루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그칠 생각 없는 비를 흠뻑 맞으며 걷는 일은 사람을 꽤 초라하게 만들었다. 답답한 자취방에 누워 지리산을 떠올렸을 때만 해도 이런 그림을 떠올리진 않았다. 발걸음을 내디딜수록 머릿속은 자취방에서 뒹굴 때보다 더욱 복잡해졌고, 머릿속이 복잡해질수록 원초적이고 생리적인 욕구에 골몰하게 됐다.
지섭은 점퍼에 달린 모자를 푹 눌러쓴 탓에 넓은 시야를 확보하기가 어려웠다. 온몸에 달라붙은 습기 때문에 숨 쉬는 것도 불편했다. 종아리에 빗물을 머금은 식물이 느닷없이 닿을 때는 흠칫, 소름이 돋기 일쑤였다.
‘그럼 그렇지’하는 자조(自嘲)가 저절로 새 나올 만큼 별 볼 일 없는 걷기, 그저 반복되는 행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건 마치 지금껏 살아온 인생 궤적을 다시 되풀이하는 것 같아 또 한 번 지섭을 소름 돋게 했다. 아까운 시간을 낭비해가며 그 절망적이고 한심한 길의 축소판을 걷고 있다니. 자괴감에 묶여 끌려가듯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어느 순간부터 뇌리를 스친 이 노래 가사가 머릿속에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절망이 가진 비열함…… 절망이 가진 비열함이라…… 희망을 품지 못한 체념과 그 포기의 천박함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또다시 사람들로부터 도망쳐온 모습이야말로 절망의 비열한 민낯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에 허우적대며 좁은 등산로를 걷는 어느 순간, 빗방울에 맞아 온몸을 엎드려며 흔들리는 야생화의 여린 모습이 얼핏 눈앞을 스쳤다.
툭.
지섭은 기계적인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땅 위에 작게 박힌 채 힘겹게 온몸으로 빗방울을 견뎌내고 있는 보랏빛 꽃망울이 보였다.
야생화는 빗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해 고개를 수그렸다 다시 재빠르게 제자리로 돌아왔다. 반복되는 그 모습이 왠지 측은해 잠시 넋을 잃고 지켜보고 있자니 꽃잎에 잊고 있던 또 다른 측은함이 맺혔다.
지섭은 언제나 고개를 숙인 채 조심스레 걷던 시든 꽃을 알고 있었다. 말을 걸 때만 잠시 고개 들어 지섭의 눈을 바라보던 마른 연경의 얼굴이 점멸하듯 야생화 앞에 아른거렸다.
“뉴욕물고기?”
“네, 뉴욕물고기.”
“그게 가수 이름?”
“응, 가수 이름.”
연경과 함께 걸을 때면 언제나 고개 숙인 그녀의 옆모습을 몰래 훔쳐봤다.
“아, 그렇구나…… 좀 웃긴 노래 같은 거 부르는 가순가?”
약간 황당하다는 반응에 연경 또한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고 말았다.
“뉴욕물고기라고 인디밴드 있어요. ‘여기에’라는 노래 진짜 좋거든요.”
자정이 넘긴 시간이라 거리는 한산했다. 지섭과 연경은 일을 마친 후 한적한 밤거리를 걸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겨울부터 회사 선배를 대신해 출연하는 주말 라디오 프로그램이 전파를 타는 동안, 연경은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을 만한 작은 방에 앉아서 2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그곳에서 30분에 한 번씩 시내 주요 도로와 고속도로, 그리고 외곽 국도의 교통상황을 전달했다. 연경은 두세 번 정도 방을 나와 정수기 물을 텀블러에 받아 갔다. 지섭은 한 주 간의 지역 문화 이슈를 정리하는 짧은 순서를 기다리며 복도를 지나는 그녀를 몰래 지켜봤다.
라디오 방송국은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방송국을 나서면 아파트 단지를 지나 내리막길이 이어졌고 그 길 끝자락에 작은 공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지섭과 연경은 가던 길을 멈추고 공원으로 들어가 빈 벤치에 앉았다. 8월의 끈적끈적한 열대야가 이미 공원을 차지하고 있었다. 연경이 이어폰 한쪽을 지섭의 오른쪽 귀에 꽂아주었다. 간간이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 엔진 소리와 벤치 근처를 맴도는 학생들의 간헐적인 웃음 사이로 서정적인 멜로디가 가녀리게 이어폰을 타고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무리 멀어도 그 길이 나의 길이면
그 어디라도 주저 없이 달려갔었지
어리석다 해도 무모하다 해도
내겐 무엇보다 소중한
나만의 길이란 걸 알기에
아무리 험하고 거친 길이라도
그 어떤 망설임도 없이 달려갔었지
소용없다 해도 무의미하다 해도
내겐 무엇보다 소중한
나만의 길이란 걸 알기에
때론 잔인한 시작과 소멸의 간격
당연한 듯 다가오는 현실의 배반
무너져 버릴까 두려워
지친 기억 모두 무시해버리고
늘 머물지 않는 바람처럼
세상이 가진 허무함을 비켜보내며
수많은 눈물을 아는 저 바다처럼
절망이 가진 비열함을
비웃어주며 사는 거야 여기에
그대와 나 모두 여기에
공원 앞쪽 도로 건너편에는 인도(人道) 위에 테이블을 차려놓고 고기와 술을 파는 식당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삼겹살, 쪽갈비 등을 불에 구우며 소주잔을 기울이는 사람들과 그들이 둘러앉은 테이블마다 피어오르는 연기가 간판 불빛과 섞여 몽롱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어때요? 좋죠?”
노래가 끝난 후 내 오른쪽 귀에 꽂혀있던 이어폰을 빼며 연경이 물었다. 노래 제목이 뭐냐고 묻자 그녀는 ‘여기에’라고 바로 대답했다.
“여기에? 아…… 좋네.”
“진짜요?”
“네, 진짜.”
“에이, 표정 보니까 아닌 거 같은데?”
“아냐, 진짜 좋아요. 가사가……”
“그죠? 가사 예술이죠?”
“네, 특히 거기, 그…… 바다처럼?”
“아, ‘수많은 눈물을 아는’ 거기요?”
“어, 거기. 수많은 눈물을 아는…… 그 바다.”
청승맞게 잠시 상념에 빠질 뻔했지만 바로 정신을 차렸다.
“근데 이 노래 어떻게 알았어요?”
“저번에 라디오 듣다 우연히요.”
“라디오?”
“응, 방송국에서 누가 신청해서 나왔는데 처음 듣자마자 빡, 꽂히더라고요. 그래서 노래 다 듣고 인터넷으로 뉴욕물고기 다른 곡들도 찾아서 들어봤는데 완전, 내 스타일이야. 나중에 기회 되면 서울 가서 공연도 직접 보려고요.”
“서울? 서울이면, 홍대나 뭐 그런데 가면 직접 들을 수 있어요?”
“뭐, 그렇겠죠?”
“서울 가서 구경한다면서? 공연이 언젠데요?”
“사실 나도 잘 몰라요.”
연경은 나를 쳐다보며 살짝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연경의 얼굴 위에 핀 미소는 자연스럽게 내 얼굴로 번졌다.
“근데, 연경 씨도 인디밴드들 음악 좋아하는구나. 이거 인디밴드 맞죠?”
“네. 뭐, 꼭 그런 건 아녜요.”
연경의 자취집은 지하철역 뒤로 이어진 원룸촌에 안에 있었다. 6평 정도 되는 원룸에 불빛이 들어오자 책상 위에 놓여있는 두툼한 토익 문제집과 일본어 회화책이 눈에 들어왔다. 내 시선이 일본어 회화책에서 멈추자 연경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깨끗해요.”
자취집에 들어가기 전, 원룸 앞 할인마트에서 나는 맥주를 골랐고 연경은 딸기 우유와 샌드위치를 골랐다.
“살찌는데.”
연경이 샌드위치를 오물거리며 작게 중얼대는 소리에 내 얼굴엔 또 한 번 미소가 번졌다.
후덥지근한 자취방에서 나는 연경의 온몸을 더듬었다.
예상보다 일찍 삼도봉에 이를 때까지 몇 번의 오르막과 내리막을 번갈아 가며 지루한 발걸음을 이어갔다. 오르막길에선 더디게 흘러가는 시간을 잊기 위해 최대한 숨소리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또 내리막길에선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발바닥이 닿는 땅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삼도봉에 이를 때까지 만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전 9시를 살짝 넘기는 동안 지섭을 내려다보는 거대한 나무들과 비에 젖은 바위들, 그리고 비탈 너머로 간간이 펼쳐진 회색 하늘만이 지섭이 본 세상의 전부였다.
삼도봉 정상에 서서 주위를 둘러봤지만, 비구름에 뒤덮인 풍경은 지섭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콱 막힌 답답함에 봉우리를 박차고 비구름 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이 답답함은 도대체 얼마를 걸어야 사라질지 알 수 없었다.
나무 밑으로 가 비를 피하는 시늉을 하며 물을 꺼내 마신 후 젖은 수건으로 얼굴과 안경에 묻은 빗물을 닦아냈다. 들리는 소리는 빗소리와 거친 숨소리뿐이었다. 그리고 노래 가사는 지겹도록 머릿속을 맴돌았다.
지섭은 10분 정도 숨을 돌린 후 다시 걷기 시작했다. 걷는 일 외엔 할 일이 없었다. 약간의 내리막길이 이어지다 곧 다시 오르막이 이어지는 것도 변함없었다. 걸어도 그곳이 그곳 같은 길이 이어질 뿐이었다.
연경과 사랑을 나눈 후, 왠지 모를 수치심에 지섭은 잠시 엎드려 있었다. 엎드린 채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연경의 얼굴을 바라봤다. 가늘고 가지런한 긴 눈썹, 눈썹 사이로 시원하게 뻗은 코와 기린을 닮은 눈동자, 갸름한 얼굴에 턱선은 더없이 뾰족해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그 눈썹과 코, 눈동자와 턱선이 조화를 이룬 연경의 얼굴이 잔잔한 어둠 위에 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우물처럼 깊고 아득한 저 눈동자 속에는 어떤 전설(傳說)이 잠겨 있는 것인지,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며 지섭은 그 우물 속으로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연경의 헛기침 소리에 우물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정신을 겨우 건져 올린 후, 몸을 돌려 원룸 천장을 멍하니 쳐다봤다.
“안 씻어요?”
천장을 바라보던 연경이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응?”
“샤워 안 하냐고.”
“어, 그냥 좀 있다.”
내 말에 연경은 대답 없이 다시 천장을 쳐다봤다.
“어제 낮에 선배 봤는데, 시청 왔었죠?”
“아…… 그냥 취재하러. 일부러 안내데스크 피해 갔는데.”
“왜요? 아는 척이라도 할까 봐?”
“어? 아니, 그냥 나 때문에 불편할 수도 있고…… 시청엔 요즘 특별한 일 없어요?”
“그거야 기자가 더 잘 알죠. 저도 나름 민원 해결하느라 바빠요.”
“하긴.”
“어제 그 공무원이 또 바나나우유 놓고 갔어요.”
“아, 이번에 들어왔다는?…… 그렇군.”
내 대답에 연경은 뭐라 할 말이 있는 듯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다시 천장을 바라봤다.
“연경 씨도 공무원 준비하라니까…… 아직 안 늦었어요.”
“일하면서 공무원 준비를 어떻게 해요…… 우리 집 뭐 먹고살라고.”
“그럼 방송국 준비는?”
“그러니까…… 잘 될 리가 없죠. 뭐든.”
“그래도 안내데스크에 앉아 있으면 틈틈이 공부 좀 할 수 있지 않나?”
“그렇게 공부해서 될 거면 다 붙죠.”
작은 한숨을 내쉬며 연경은 돌아누웠다.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는 걸 깨닫자 민망한 마음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는 연경의 등을 쳐다보다 슬며시 어깨를 쓰다듬었다.
“선배도 취재하면서 공무원들 자주 만나잖아요? 누구 소개해준다는 사람 없어요?”
연경의 말에 나도 모르게 작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 같은 놈을 누가…….”
나는 연경의 가녀린 등 곡선을 손등으로 어루만졌다.
“연경 씨는 아직 젊고 기회도 많으니까…….”
이번에는 연경의 입에서 작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스물아홉이 뭐가 젊어요, 내일모레가 서른인데…… 그리고 젊다고 다 기회 있나?”
연경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나는 대화 주제를 빨리 바꿔야 할 것만 같아 떠오르는 대로 말을 이었다.
“참, 재계약하는 거 이달 말이라고 했죠?”
하지만 바꾼 화제 또한 그리 좋은 것이 아님을 내뱉는 순간 깨달았다.
“네.”
연경이 짧게 대답했다.
“뭐, 특별히 문제없잖아요? 본부장도 좋게 본다며?”
“…… 얼마 전에 잠깐 멘트 씹었는데 그게 자꾸 걸려서…….”
말끝을 흐리는 연경의 목소리가 애처로웠다.
“리포터 자리 하나 유지하기도 어렵네…… 선배도 여전히 해결 잘 안 돼요?”
“나? 나도 뭐, 똑같죠. 그냥 이젠 뭐가 뭔지도 모르겠고.”
돌아누운 연경의 등이 바람 불면 사라져 버릴 모래 언덕처럼 위태롭게 느껴졌다. 점점 지쳐가는 연경의 모습을 그저 지켜만 보는 심정은 모래알보다 더 보잘 게 없었다. 어색한 침묵이 좁은 자취방을 가득 메웠다. 그 어색함을 깬 건 연경의 느닷없는 질문이었다.
“답답해요?”
돌아누운 연경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응?”
“답답, 하냐구요.”
“…… 넌?”
“답답해.”
“…… 많이?”
“자꾸만…… 자꾸만 답을 찾으라고 강요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답답해.”
“…… 그러게.”
지섭은 연경을 살며시 끌어안았다. 그리고 연경의 목덜미에 코를 갖다 대고 연경의 체취를 몸속 깊이 빨아들였다. 연경은 저항하지 않고 계속 등을 돌린 채 조용히 숨을 쉬었다.
“선배.”
등을 돌린 채 누워있던 연경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연경의 가슴을 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선배.”
“응.”
“…… 이제 우리 그만할까요?”
연하천대피소는 공사 중이었다.
비를 피할만한 곳은 파란 비닐을 덮어쓴 모래와 나무 자재가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지섭처럼 쉴 곳을 찾지 못한 한 무리의 등산객들은 화장실 근처에 모여 우의를 뒤집은 채 앉아 있었다.
잠시 대피소 주변을 서성였지만 앉아서 비를 피할만한 곳은 보이지 않았다. 서서 비를 맞는 것보다는 걸으면서 비를 맞는 게 그래도 낫겠다 싶어 떼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지금과 같은 속도로 걷는다면 다음 대피소인 벽소령까지는 약 2시간 정도가 걸릴 것 같았다. 잠시 멈췄던 비는 좀 전부터 다시 가늘게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굵은 빗방울로 변해있었다. 안경을 뒤덮은 빗물 때문에 걸음을 잠시 멈춰야 할 만큼 상황은 최악이었다. 상황이 좋지 않더라도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오직 걷는 일뿐이었다. 그래서 다시 볼 것도 없고 즐거울 리도 없는 오르막과 내리막의 지루한 반복을 이어갔다.
아무 생각 없이 뚫린 길에만 시선을 고정하며 걷다가도 간혹 경치를 감상할 만한 탁 트인 공간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여전히 지섭에게 경치 따위는 허락되지 않았다. 분명 오후 1시가 지났는데 지금이 오전 6시인지, 오후 5시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흐릿하고 답답한 풍경만이 가득했다. 슬슬 배낭의 무게도 거슬리기 시작했다. 최대한 가볍게 챙기려고 물과 버너, 대피소에서 먹을 음식을 제외하곤 배낭 속에 따로 들어있는 것도 없었다. 하지만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두 어깨에 느껴지는 배낭 무게가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 다행인 것은 오전 내내 머릿속을 맴돌던 노래 가사가 어느 순간부터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래 가사 한 구절 사라졌다고 머릿속이 맑아지진 않았다. 정리되지 않은 잡념들은 여전히 머릿속을 부유하고 있었다.
끝 모를 오르막이 버티고 있으면 오로지 발등만 바라보며 꾸역꾸역 산을 타는 데 집중했지만, 오르막을 지나 평지가 이어지면 전혀 예측 못 한 쓸데없는 생각들에 다시 시달렸다.
배낭보다 더 무거운 잡념을 머리에 이고 형제봉을 지나 30여 분 정도 더 걷자 벽소령대피소가 1킬로미터도 남지 않았다는 표시판을 지나칠 수 있었다. 표지판에 이어 곧 미끄러운 철 계단이 나타났고 발걸음을 조심하며 계단을 천천히 내려왔다. 계단을 다 내려온 후부터는 조금 속도를 내며 걸었다. 앞으로 20여 분 정도만 더 걷는다면 네 시간 가까이 이어온 걸음을 쉴 수 있었고, 무엇보다 이 저주 같은 비를 피할 수 있었다. 게다가 비록 편의점 샌드위치와 우유, 미니 초코바 몇 개뿐이지만 허기진 배도 채울 수 있었다. 다가올 짧은 휴식의 달콤함을 상상하니 절로 걸음이 빨라졌다. 그렇게 배낭을 내려놓고, 등산화를 벗고 샌드위치와 우유를 먹는 생각을 하고 또 하며 왼쪽 발에 힘을 싣는 순간,
훅, 하는 소리와 함께 심장이 멎는 것 같은 전율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