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끝 #4.

단편소설

by 고귀한 먼지

가슴속에 뜨거운 것이 식어버리는 일은 생각보다 쉬웠다. 뜨거운 가슴이 식는 데 영혼을 뒤흔들 강렬한 사건 따위는 필요치 않았다. 그저 하루하루 쫓기듯 살다 보면 식어버린 가슴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랄 때가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누군가 만들어놓은 틀 속에서 아등바등하다가 지쳐버리는 일. 그래도 그 ‘틀’에 대해 생각했던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젠 누구 하나 그 틀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아니, 그 틀을 생각한다는 것 자체를 용납하지 않았다.

들판에 생뚱하니 자리 잡은 역 앞에서 선배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잠수 다 탔냐?”


떨떠름한 표정으로 선배는 인사 대신 그렇게 안부를 물었다.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할 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가자, 술이나 빨러.”

재래시장 안쪽으로 쭉 들어가자 돼지 삶는 냄새가 콧구멍 속으로 사정없이 들어왔다. 선배는 테이블이 6개 정도밖에 없는 작은 순대국밥 집으로 들어갔다.


“이런 데가 맛이 괜찮더라고.”


아직 해가 지려면 두어 시간 정도는 남아있었다. 순대 한 접시에 국물을 놓고 선배와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정말 그냥 술 한잔하고 싶어서 온 겨?”

“…….”

“뭐여?”

“…….”

“술이나 마시자.”


선배는 내 빈 잔에 소주를 따랐다. 나는 소주를 단숨에 비운 후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노조, 정리할게요.”

“…….”


선배는 자신의 빈 잔에 소주를 따른 뒤 나처럼 단숨에 소주잔을 비웠다.


“힘들어?”

“그냥…… 회사도 정리하려고…….”

“…….”


선배는 다시 잔에 소주를 따라 단숨에 비운 후 벽 쪽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리고는 다시 술잔에 술을 부었다.


“뭐 해서 먹고살려고? 너도 집에 돈 별로 없잖아.”


지섭은 대답 대신 잔에 담긴 소주를 한입에 몸속으로 털어 넣었다.


“지섭아, 나 요즘 찜질방에서 지낸다. 어? 하는 일도 없이, 집에도 못 가고 종일 내가 뭐하며 사는지 아냐?…… 너까지 왜 그러냐 정말? 너무들 한다, 진짜.”


지섭은 비어있는 잔에 소주를 채웠다.


“그냥…… 이제 예전처럼 기자 생활 못 할 거 같아서…….”


돼지 간을 집어 소금을 찍던 선배가 나를 쳐다봤다.


“예전처럼? 예전처럼 뭐? 어? 예전엔 니가 어땠는데?”

“그냥…… 별로 보람 있던 적도 없었던 거 같고…….”


선배는 간을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보람은 개뿔…… 야, 그래도 너는 광고 따오라고 닦달하지는 않잖아? 경제부 애들 봐봐.”

잔을 든 선배에 맞춰 나도 잔을 들어 소주를 비웠다. 소주가 쓰게 느껴지지 않아 불안했다.

“그냥…… 전 그냥, 노조 하면서도 뭐 힘도 안 되고.”


선배는 화난 듯 소주잔에 담긴 소주를 거칠게 입 안으로 털어놓았다.


“야, 우리가 예전처럼 기자 생활하지 말자고 이렇게 싸우는 거 아녀? 그냥 월급 몇 푼 더 받자고 싸운 거 아니잖어. 알아, 우리 이겨봤자 당분간은 똑같겠지 뭐. 광고주면 핥아주고 안 주면 존나게 까고 뭐, 그러겠지. 근데 야, 일단 우리가 뭐, 좀 우리 권리라도 제대로 대접받아야 그다음도 생각할 수 있고, 뭐 그런 거 아니냐? 막말로 너도 이제 여기 떠나고 어디 갈 데 있어? 너도 이제 서른 중반이야. 받아줄 데도 별로 없어. 너 결혼은 안 해?”

“선배.”

“어?”

“…….”

“뭐?”

“…….”

“뭐? 말해, 불렀으면 말을 해야지?”

지섭은 차마 가슴 속에 맴도는 말을 내뱉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