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끝 #5.

단편소설

by 고귀한 먼지

잠에서 깨니 불붙은 통나무처럼 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심장이 뛸 때마다 머릿속 혈관을 송곳으로 찌르듯 편두통이 심했고 뼈마디는 누가 발로 꾹꾹 밟는 것처럼 통증이 이어졌다.

새벽 1시를 조금 넘긴 세석대피소의 한 구석, 퀴퀴한 냄새가 밴 모포 속에 숨은 몸뚱이는 땀으로 범벅이 됐고 식도가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처럼 바짝 말라붙어 있었다. 심한 갈증을 느끼다 결국 죽는다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목이 타는 고통 속에서도 곁엔 아무도 없는 것, 그리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잖은 일에 이토록 심각해지는 것이 지섭이 생각해도 어이없었지만, 실소를 터뜨릴 기력도 없었다.

그저 사람이 그리워졌다. 연경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내려간다 해도 이제 연경을 다시 만날 수는 없었다. 연경을 생각하니 몸이 다시 뜨거워지고 편두통이 심해졌다.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대고 이 고통이 수그러들기만을 바라며 천천히 의식을 잃어갔다.


15분 교통정보입니다. 막바지 휴가철을 맞아 낮 동안 전국의 고속도로가 심한 정체로 몸살을 앓았는데요, 현재 대부분의 고속도로 통행이 평소 주말 수준으로 수월한 편입니다. 다만 낮 동안 경기도와 충청지역 일부에 내렸던 비로 인해 고속도로 곳곳이 미끄러울 수 있으니 안전거리 유지와 과속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연경이 속마음을 털어놓은 후 주말이 돌아올 때까지 우리는 아무 연락이 없었다. 일주일이 지나 방송국에서 다시 본 연경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복도를 지나 텀블러에 생수를 담았다.


‘방송 끝나고 잠깐 봐요. 기다릴게요.’


고민 끝에 카톡을 보내자 프로그램 2부 순서가 끝나고 광고가 나오는 동안 연경에게서 답장이 왔다.


‘네.’


지섭은 단순하고도 선명한 한 글자에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방송을 마치고 나온 연경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외고를 지나 내리막길까지 걸어오면서도 우리는 말이 없었다. 공원이 보이기 시작할 때쯤 연경이 입을 열었다.


“한잔할래요?”


공원 맞은편 다닥다닥 붙어있는 식당 중 한 곳에서 연경과 나는 삼겹살을 구우며 소주를 마셨다. 연경은 야무지게 쌈을 싸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으며 조용히 소주잔을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면서도 연경과 나는 별말이 없었다.

가게를 나와 지섭과 연경은 자판기 커피를 들고 공원 벤치에 앉았다. 가로등 불빛에 비친 연경은 방금 마신 술로 얼굴이 붉게 물든 모습이었다.


“선배, 저 내일 서울 가요.”


커피를 홀짝이며 앞을 바라보던 연경이 불쑥 말을 꺼냈다.


“서울? 무슨 일 있어요?”

“일은 무슨, 친구 결혼식에요.”

“아, 친한 친군가 보네.”


내 말에 연경은 고개를 숙인 채 살짝 웃음을 지었다.


“친했죠…… 예전엔.”


연경의 반응을 보자 나는 실수라도 한 것처럼 머쓱해져 손에 들고 있는 커피를 입에 댔다.


“대학 다닐 때 같은 과에 정은이라고 있었는데…… 결혼한대요.”

“아…… 기분 좀 묘하겠네. 나도 친한 친구 결혼할 땐 기분 좀 그렇던데.”

“글쎄요…… 근데, 잘 모르겠어요…… 솔직히 정은이 좀 미워하거든요.”


의아한 눈길로 연경을 바라봤지만, 연경은 내 표정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다시 말을 이었다.


“입학하고 OT 때 처음 만났는데, 말도 잘 통하고 서로 좋아하는 것도 비슷하고…… 무엇보다 걔도 아나운서가 꿈이라 금세 친해졌어요. 저는 서울 가긴 간당간당하고 집 사정도 생각해서 여기 선택했는데 걔는 뭐, 고3 때 실컷 연애하다 여기 겨우 붙었다고…….”


취기 때문인지 연경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높은 톤이었다.


“처음엔 정은이랑 시험 준비 참 열심히 했는데…… 걔 얼마 전까지 오스트리아에 있었어요. 호주 말고 유럽에 있는 오스트리아요. 거기 어디더라? 잘츠캄머굿? 알프스 뭐 그쪽에 있다는 곳인데, 대박, 진짜 동화 속 풍경 같아요. 저도 한 번 가봤거든요, 3년 전에. 졸업하고 진짜 큰맘 먹고 정은이 만나러 갔는데…… 암튼 뭐, 5일 중 4일은 눈, 비 내리는 그런 곳이더라고요.”


또한 평소와 달리 연경의 말투는 새침했다.


“그래도 뭐 정은이가 구경시켜줘서 비엔나에 있는 시청사도 가보고, 잘츠부르크 길거리도 걷고, 근데 거기 사람 진짜 많아요. 또 되게 큰 박물관 가서 중세 갑옷도 구경하고…… 아, 성 슈테판 성당? 근데 거긴 공사 중이라 들어가 보진 못했어요.”


들뜨고 새침한 목소리로 옛 추억에 잠기며 말을 잇는 연경의 모습에는 좀 전까지 심각했던 분위기를 찾을 수 없었다.


“그때 정은이는 그곳에서 계속 공부할 거라고 했어요. 심리학 공부요. 아나운서는 진작 포기했고…….”


하지만 조용히 말을 끊은 연경을 바라보니 눈에 물기가 어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잘 놀았으면서…….”


연경은 옛 추억에 잠긴 듯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는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은 뒤 다시 얘기를 시작했다.


“선배, 저 그때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많이 울었어요. 그냥…… 그렇더라고요. 그때가 휴학하고, 알바 뛰고 하면서 2년 늦게 졸업한 때였는데, 참…… 뭐가 그렇게 서럽던지…… 가게 접은 부모님 생각도 나고, 막내 생각도 나고…… 뭐, 암튼 그랬어요.”


그때부터 연경의 목소리는 조금씩 젖어들기 시작했다. 파르르 떨리는 얼굴을 지켜보면서도 나는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연경을 꼭 안아주고 싶었지만, 왠지 그래선 안 될 것 같았다.

연경과 헤어진 후 자취방에 들어온 나는 씻지도 않은 채 방바닥에 누웠다.


“선배는 사는 게 아니라 벌 받는 것 같다는 느낌 들 때 없어요?”


천장을 바라보며 꽤 많은 생각들이 스쳤지만, 구체적으로 떠오르는 생각 따윈 없던, 그런 새벽이었다.


“외로웠나 봐요…… 제가 좀 이기적이에요…… 미안해요, 선배.”


뜬 눈으로 새벽을 보낸 후 나는 평소와 같이 출근했다. 그리고 부장님께 취재일보를 올리며 사직서를 함께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