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다리를 지나 세 시간 정도 더 걸음을 잇자 흙길이 아닌 시멘트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민박이라고 씌어있는 간판을 보니 지리산을 다 내려왔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산의 끝자락은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세상과 이어져 있었다.
산을 거의 다 내려올 때쯤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비구름이 걷힌 지리산 자락은 맑고 고요했다. 온몸이 젖은 초라한 행색으로 작은 사찰을 지날 때 어디선가 비에 홀딱 젖은 개 한 마리가 달려왔다. 순간 겁이 났지만, 폭포 앞에서 모든 힘을 쏟아내 저항할 힘도 없었다. 개는 그때부터 지섭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나를 앞서가다 잠시 멈춰 먼 산을 바라보고, 다시 내가 다가오면 뒤를 밟으며 버스정류장까지 함께 걸었다.
진주행 버스표를 끊고 한 음식점 앞 정자에 앉아 추위에 떨며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개는 조용히 지섭의 곁을 지켰다. 어제 내린 비로 계곡에는 성난 물줄기가 요동치며 흘러가고 있었다.
“어제 얼추 100㎜ 넘게 왔지 아마. 지랄하고 장마 땐 그렇게 안 오더만.”
버스 기사의 넋두리를 통해 비가 생각보다 많이 내렸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어서 왔소?”
출발 시간을 기다리는 기사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말을 걸었다. 지섭은 어디라고 대답해야 할지 잠깐 망설였다.
“서울이요.”
“서울? 서울 요즘 뭐…… 그 살만하요? 나도 젊었을 때 마포 쪽에 잠깐 있었는디. 서울 뭐, 지랄나게 복잡하기만 허지. 난 돈 줘도 살기 싫을 거 같은디.”
10여 분 뒤 버스는 천천히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버스는 지리산 자락을 가볍게 넘어 중산리 정류장에서 잠시 멈춘 후, 산청군을 지나 진주로 시원하게 내달렸다. 차창 밖 풍경을 바라보며 지섭은 서울에 가게 된다면 무엇을 해볼지 생각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홍대 거리에 가보는 것이었다. 홍대 거리에 가서 뉴욕물고기의 공연을 직접 보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차창 밖 풍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회색 비구름이 간간이 남아있긴 했지만 파란 하늘은 더없이 선명했다. 산자락을 따라 어제 내린 물줄기가 시원스럽게 흐르며 물비늘로 햇빛을 반짝, 튕겨냈다.
비구름이 걷힌 지리산 자락은 신선했다. 방금 세수를 마친 얼굴처럼 투명하고 생기 넘치는 초록의 민낯이 찬란한 햇빛에 빛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저 눈부신 초록의 끝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버스는 계속 시원스레 국도를 내질렀다.
지섭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