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끝 #6.

단편소설

by 고귀한 먼지

눈을 뜨자 칙칙한 어둠 속에서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야, 비 계속 오는데?”


한 등산객이 대피소 문을 열고 들어오며 하는 말을 듣고 스마트폰을 찾아 시간을 확인하니 오전 6시를 막 넘기고 있었다. 목구멍이 말라비틀어진 것과 왼쪽 손목이 욱신거리는 것을 제외하고 몸 상태는 생각보다 많이 나아져 있었다. 하지만 땀을 쏙 뺀 몸뚱이는 바위에 눌린 것처럼 꿈쩍하지 않았고 미열 또한 잔불처럼 남아있었다. 무엇보다 여전히 밖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빨랫줄에 걸어놓은 바람막이 점퍼는 대충 말랐지만, 밖에 나가면 금세 또 젖어버릴 것이 분명했다. 다시 비를 맞아야 한다는 사실이 죽음 같은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눈을 감은 채 그냥 이대로 계속 누워있고 싶었다. 하지만 누워있을수록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만 늦어질 것이 뻔했다. 작고 더러운 방에 불과했지만 익숙한 냄새가 배어 있는 자취방이 벌써 그리워졌다. 그 그리움에 힘입어 온 힘을 다해 철근보다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상처 난 부위는 여전히 쓰라렸고 양 허벅지와 종아리가 욱신거렸다. 특히 왼손을 잘 쓸 수 없어 모든 행동이 불편했다. 주름이 새겨질 정도로 인상을 쓴 채 근육통을 참으며 짐을 대충 정리하고 1층으로 내려가 밖을 살펴보니 어제보다 더욱 굵어진 빗줄기가 쉴 새 없이 내리고 있었다.


“천왕봉 못 올라가요. 통제됐습니다.”


국립공단 직원의 목소리에 짜증이 섞여 있었다. 그 말을 들은 후 한동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1층 대피소 복도에 고사목처럼 서 있었다. 생각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10여 분 정도 헤맨 끝에 지섭은 결국 대피소에서 일회용 우의를 사 몸에 둘렀다.


하산 길은 세석대피소에서 거림마을까지 네, 다섯 시간 정도 걸어야 하는 길이었다. 쉬지 않고 내리는 비로 인해 좁다란 길은 이미 빗물이 흐르는 작은 도랑이 돼 있었다. 도랑을 가득 채운 물줄기는 정신없이 산 밑으로 향했다. 나뭇잎을 사정없이 때리는 빗방울 소리와 도랑을 타고 내려가는 성난 물줄기 소리는 나를 집어삼킬 듯 맹렬했다. 그 물소리는 천왕봉을 오르지 못한 이번 종주의 실패를 각인시키며 내 무능함을 질책했다. 통렬한 기세로 덮칠 듯 위협하는 빗소리에 오기로 저항하듯 한 걸음씩 발걸음을 내디뎠다.

계단을 만나 편하게 내려올 때도 있었지만 빗물에 길을 뺏겨 방황할 때는 어김없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했다. 그래도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이제 더는 잡을 것도, 버릴 것도 없다는 생각이 내려가는 동안 함께 했다. 오직 한걸음의 발자국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는 일은 나를 떠나지 못하는 상념과 대화를 나누는 행위였다. 그 상념에 정신이 팔려 어디가 어딘지 구분 못 한 채 무작정 내려왔을 때, 꽤 넓은 계곡을 가르는 다리를 만났다.

지섭은 전에 지나쳤던 여느 다리와 같겠거니 생각하고 무방비 상태로 그 다리를 맞았다. 하지만 다리 위에 발을 댄 순간, 더는 걸음이 이어지지 않았다. 아마도 지리산에 압도된 건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황홀경은 어떤 체험 뒤에 느껴지는 감정일까? 어느 정도의 쾌감이라야 황홀경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연경의 몸을 더듬으며 느꼈던 조급함을 황홀경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아마 그렇게 느꼈었다면 나는 인생을 정말 몰랐었다는 걸 그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지섭의 눈앞에는 지금껏 볼 수 없었던 생각지도 못한 장관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무 생각 없이 다리 위에 발을 대며 무심코 왼쪽으로 고개를 돌린 그 순간, 작다고만 생각했던 폭포수에서 거대한 물줄기가 나를 향해 쏟아져 나오고 있던 것이다. 물줄기는 지섭을 아슬아슬하게 덮치지 못했고 그래서 더욱 처절했다. 그 처절하게 내지르는 소리는 얼마나 기세 등등하고 부숴버릴 것 같은 바람은 또 얼마나 잔인했던가.

지금까지 내린 비가 모두 이곳에 모여 지섭에게로 달려드는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지리산에 들어온 이후부터 지섭의 영혼에 들러붙어 집요하게 괴롭혔던 그 비가 마지막 일격을 가하는 것처럼 폭포는 달려들고 있었다.

그 압도적인 타격(打擊) 앞에 몸 전체에는 미친 듯 전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지섭은 거부하고 또 거부했지만, 그 전율은 기어이 눈앞에서 절규하는 물줄기를 향해 미친 듯 소리를 내지르게 했다.


“야!”


이어 남아있는 기력을 모두 토해내듯 길게, 최대한 길게 폭포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야아아아!”


이 외침을 시작으로 지금껏 심장 속에 억눌렸던 분노가 방언 터지듯 쏟아졌다.


“야 이 씨발 새끼들아! 어! 이 씨발놈들아! 그것밖에 안 돼?”


그 순간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해방감이 지섭을 전율케 했다.


“안 죽어 씨발! 개 씨발 새끼들아! 내가 죽을 것 같냐고! 어! 내가 죽을 것 같냐고! 내가 어! 내가 씨발! 니들한테 당할 것 같냐고! 이 씨발놈들아!”


지리산 중턱에 자리 잡은 다리, 계곡을 가로지르는 그 다리 위에서 지섭은 완전히 미쳐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