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1. 피고들은 연대하여 원고에게 500,000,000원 및 이에 대하여 이 사건 판결확정일 다음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 연 20%의 비율에 의한 금원을 지급하라.
2. 소송비용은 피고들이 부담한다.
3. 위 제1항은 가집행할 수 있다.
라는 판결을 구합니다.
편집국에서 들고 나온 짐은 조촐했다. 쇼핑백 안에는 그동안 썼던 취재 수첩과 필기구 몇 개가 전부였다. 밖으로 나와 5년 4개월 동안 드나들었던 8층짜리 건물을 잠시 쳐다봤다. 건물 맨 위층 모서리에 ‘상가 임대’라는 글자와 전화번호가 크게 새겨진 현수막이 붙어있었다.
택시를 타고 자취 집에 돌아와 스마트 폰을 만지작거리던 중 오랜만에 초인종 소리를 들었다. 현관문을 여니 우체국 직원이 두툼한 서류 봉투를 하나 내밀며 서명을 요청했다. 서류 봉투는 법원에서 온 전보였다.
“끌어봤자 뭔 수 있어? 어쨌든 시간은 회사 편인데…… 괜히 족벌이야? 썩어도 3년은 가.”
“뭐,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이렇게 있어요? 지부장님 지금 쫓겨난 마당에 성명서라도 한 장 붙여야 하는 거 아니에요?”
“또 성명서? 야, 우리 꼬라지 좀 봐라. 어? 조합원 이제 스무 명도 안 남았다.”
“그러니까 좀 더 강하게 나가자니까. 겁쟁이들만 모여서.”
“야, 말조심해. 새끼가…… 겁나는 게 아니라 현실을 좀 똑바로 보라고. 우리만 고립된 거 몰라? 기자회견 해도 같은 기자 놈들 코빼기도 안 보이지, 다들 자기 살길 바빠 코딱지만 한 동네에서 뭐 우리 신경이나 쓰냐고!”
“꼬라지라뇨? 선배야말로 말 좀 가려서 하세요. 솔직히 제대로 한 번 해보지도 못하고 이게 뭐예요?”
“아 참, 우리끼리 또 왜 그래?…… 일단 우리도 체불임금 민사로 다시 넣죠? 박 실장님한테 어떻게 해야 할지 얘기도 좀 더 듣고.”
“야, 답답하다 진짜. 어? 싸우더라도 뭐가 있어야 싸우지. 언제까지 언론노조 도움받아서 할 거야? 솔직히 이거 우리 싸움인데 회사 들어가서 한 번 봐봐. 사람들 싸울 생각이나 있나. 참…… 이게 기자라고.”
“그럼 도대체 뭘 하자는 건데?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선배가 더 답답해, 씨발 진짜.”
“뭐 씨발?”
“아니, 아 진짜…… 우리끼리 이러자고 만난 거 아니잖아요? 솔직히 사측은 이제 어? 뭐, 우리 하나씩 징계 때릴 거 뻔한데.”
“그러니까 이렇게 그냥 앉아서 당할 거야? 솔직히 이제 우리 여기서 벗어날 수도 없어. 가는 데까지 가 봐야지?”
“그나저나 박용운하고 강도영 그 새끼들은 지금 뭐 하고 있대냐? 개새끼들, 지들이 언론노조 가입이니 지부장 맡아야 한다느니 꼬드기고 할 건 다 했으면서.”
“야, 지섭아. 너도 말 좀 해봐. 넌 오늘도 말 한마디 없냐?”
“맞아, 윤 기자도 말 좀 해봐…… 뭐, 말을 해야 생각도 알고 힘도 모으고 그럴 거 아니야. 여기 지금 윤 기자만 힘든 거 아니잖아?”
싸움이 길어질수록 지쳐가는 건 당연했다. 문제는 뜻을 모았던 이들이 날 선 칼이 돼 서로에게 상처 내는 일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 하는 일이었다. 1년을 넘기자 누구는 쉽게 포기하고 또 누구는 쉽게 상대편이 됐다. 그걸 고스란히 지켜봐야 하는 억울함은 이내 분노가 돼 다른 사람들이 다가오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물론 지섭은 이미 오래전부터 안개처럼 몸을 휘감은 무기력 속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도저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사실, 엄밀히 따져보면 나는 싸움이 시작되고부터 도망갈 곳을 찾는 데 더 열중이었다. 싸움의 끝에 다다르기까지 견뎌야 할 과정의 잔인함을 결코 견뎌낼 수 없을 거란 걸,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속에 있는 생각을 끄집어내는 일이 너무나 어려웠다.
바위 밑에 낙엽들이 쌓여있지 않았다면 진짜 큰일이라도 나지 않았을까 싶었다.
물기 묻은 바위에 왼발이 미끄러지면서 약 2미터 정도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떨어지는 순간 본능적으로 왼팔이 땅을 짚었는데 그 땅에 낙엽들이 생각보다 수북이 쌓여있었다. 떨어짐과 동시에 화들짝 놀란 지섭은 상처를 살필 겨를도 없이 허겁지겁 그 바위를 벗어났다. 바위를 어느 정도 벗어나 오르막길 중턱쯤에 이른 후에야 거친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걸음을 잠시 멈추고 숨을 조금씩 고르기 시작하자 왼손바닥과 오른쪽 무릎에서 불에 덴 것 같은 통증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손목이 욱신거리는 것이 약간 삔 것 같았다. 왼손바닥과 오른쪽 무릎에서는 생각보다 피가 많이 흘렀다. 손바닥에 돌조각이 박혀있어 이를 악물고 돌조각을 끄집어냈다. 오른쪽 무릎에 난 상처의 크기는 500원짜리 동전만 했다. 손수건으로 흐르는 피를 닦아내려 하자 살을 찢는 고통에 절로 신음이 새 나왔다. 아직 세석대피소까지 세 시간은 넘게 걸어야 했다. 비는 여전히 그치지 않고 있었다.
발걸음을 옮기는 매 순간 통증이 밀려와 죽을 맛이었지만 나름 좋은 점도 있었다. 넘어지고 난 후 그동안 죽어있던 몸의 감각들이 깨어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리산의 속살이 그제야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지섭을 포위한 채 지키고 서 있는 나무 기둥의 울퉁불퉁한 껍질 주름들이 선명하게 박혔고, 나뭇잎에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도 한층 또렷하게 들렸다. 또한 몸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세게 뛰는 심장박동도 느껴졌다. 그전까지 비구름에 덮인 풍경을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면, 이제는 비구름 속에 존재하는 세상의 모습을 눈이 아닌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감각이 선명해진 만큼 산속에 혼자뿐이라는 사실 또한 더욱 확실하게 각인됐다. 살아있음의 강렬함과 홀로 있음의 처절함이 무릎과 손바닥에서 흘러나오는 뜨거운 붉은 피 안에 담겨있었다.
그 피를 보자 이상하게 전혀 생각지도 못한 웃음이 터지기 시작했다. 한 번 웃음이 터지자 이내 걸음을 멈추고 눈물이 날 정도로 배를 쥐어 잡아야 했다. 한바탕 웃어젖힌 후에도 간간이 피식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발걸음을 이었다.
웃음은 벽소령대피소에서 빵을 우물거리며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면서도, 절뚝거리는 발걸음으로 다시 비를 뒤집어쓰며 세석대피소를 향하는 도중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통증으로 고통스러웠지만, 그 통증이 느껴질 때마다 피식 웃음을 흘리며 엉거주춤한 자세로 걸음을 이어갔다.
오후 4시를 지나면서 날은 급격하게 차가워졌다. 통증보다 추위에 부들부들 떨며 오후 6시가 넘어서야 세석대피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대피소 앞에 마련된 취사 공간에는 젊은 남녀 한 쌍이 앉아 있었다. 코펠에 끓인 라면을 나눠 먹던 그들은 절뚝거리며 다가오는 지섭을 멍하니 쳐다봤다. 그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지섭은 빈 의자 앞에 다가가 배낭을 내려놓고 천천히 바람막이 점퍼를 벗은 후 상의를 갈아입었다. 지섭 무릎의 상처를 발견한 여성이 연고를 바르겠냐며 조심스레 말을 걸었지만, 지섭은 사양하는 몸짓을 한 후 젖은 수건으로 굳기 시작한 딱지를 감쌌다.
얼른 뜨거운 라면 국물이 몸속으로 들어가야 이 추위를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바람 때문에 버너의 불을 붙이는 일 또한 쉽지 않았다. 겨우 버너에 불을 붙인 후 물이 빨리 끓기만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지섭의 몸은 안쓰러울 정도로 부들부들 떨렸다. 이가 딱딱 부딪히는 몸을 녹이기 위해 우선 소주를 몸속에 급히 털어 넣었다. 소주가 식도를 훑자 뱃속부터 뜨거운 기운이 점차 올라오더니 이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물이 끓기 시작하자 라면을 넣고 대충 익힌 뒤 입천장이 데는 것도 잊은 채 허겁지겁 면발을 단숨에 먹어 치웠다.
라면과 소주를 다 먹고 뒷정리를 한 뒤 2층 대피소 사무실로 올라가 자리를 배정받았다. 모포 두 장을 사 한 장은 바닥에 깔고 나머지 한 장은 얼굴까지 뒤집어썼다.
탈진하다시피 뻗어버린 지섭의 몸은 이미 불덩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