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신웅 Sep 09. 2022

축복받은 하루

2022년 9월 9일 금요일, 맑음.

어제와 오늘, 고향에 내려와 잘 얻어먹고 푹 쉬면서 게으르게 보냈다. 그렇지 않아도 게으른데 명절 기간엔 더 게을러지니 할 일은 점점 쌓여만 간다. 그렇다고 아예 손을 놓고 있진 않았다. 내일부턴 조금 더 분발해야겠다. 하지만 추석이라 아침에 차례를 지내고, 저녁엔 몇 년 만에 우리 가족이 모두 모여 술자리를 가질 것 같아 가능할지 모르겠다. 

뭐, 그래도 아직 일요일과 월요일이 있으니까.     


게으른 시간을 보낸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줄여보기 위해 일기를 쓴다. 반성하고 다짐하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가져야 새로운 마음으로 내일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아서다. 

오늘 기억에 남는 시간은 저녁을 먹고 산책을 나선 길이다. 내가 졸업한 모교를 지나 예전에 관청이 있던 문화재를 둘러보고, 추석 전야를 맞고 있는 시내를 걸으며 사람들 구경했다. 몇 년 전부터 느끼는 거지만 명절 기간 고향 시내를 저녁에 누비면 외국인 노동자들을 많이 마주치게 된다. 동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 국가에서 돈을 벌기 위해 타국으로 온 이들이다. 대부분은 동포들끼리 무리를 지으며 저녁을 먹으러 가거나 시내에서 함께 어울리는 모습을 본다. 그들도 오늘 같은 날은 고향에 있는 가족이 무척 그리울 거다. 그 그리움을 동병상련의 동료들과 함께 보내는 건 그나마 나은 일이다. 

오늘은 시내에서 큰 가방을 옆에 놓고 불안한 눈빛으로 홀로 앉아있는 건장한 외국인 노동자의 모습을 봤다. 걸으면서 잠깐 바라본 게 다였지만 그의 눈빛과 굽은 어깨, 그리고 옆에 놓인 가방은 나를 상상의 세계로 빠뜨리기 충분했다.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렇기에 내 마음대로 그가 느낄 고독과 책임감, 그리고 두려움 등을 상상했다. 오늘 잘 곳은 있을까?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아니면 사기나 배신을 당해 쫓겨나 갈 곳 없는 처지에 놓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     


아마 추석을 하루 앞둔 날이었기에 낯선 외국인 노동자를 향한 동정심이 평소보다 더 컸던 것 같다. 그저 그들이 머나먼 타국에서 멸시당하지 않고, 정당한 권리를 누리며 떳떳하게 일하다가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길 바란다.




나이를 먹으니 나도 확실히 마음이 여려지는 것 같다. 또 그만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외로워지는 것 같다. 온 가족이 모여 근심 걱정을 잠시 잊고 따뜻한 가족의 정을 느껴야 할 명절에 참.     


우리 집은 뭐 거의 변함이 없다. 이제는 늙으신 부모님이 걱정되지만 아직까진 여전히 두 분이 티격태격하시며 잘 지내시고, 두 형도 크게 나아지진 않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아등바등하며 현실에 맞서고 있다. 그리고 나. 나는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면서도 아직 꿈을 놓지는 않았다. 그리고 더디지만, 그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제는 생각이 조금 바뀌기도 했다.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과정을 먼저 생각한다. 결과야 어떻든 과정 안에 있다면 나는 옳은 길을 가고 있는 거니까.     


어제와 오늘, 조금은 게으르게 보냈더라도 하루를 보내기 전에 이렇게 일기를 쓰니 아주 의미가 없어 보이진 않는다. 정말 그러네. 사랑하는 부모님과 함께 평범한 하루를 보낸 것, 그거야말로 가장 행복하고 축복받은 하루가 아니었던가!


축복의 하루를 보냈음에 감사하자. 그리고 내일은 세상을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시간도 갖자. 아직 늦지 않았고,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해도 된다.     


나쁜 놈들만 빼고,

모두 풍성하고 넉넉한 한가위 보내길.     


고맙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떳떳하고 아름답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