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재미
재미
콜럼버스는 또 충격을 받았다. 다이노들의 재미Zemís 때문이었다. 특히 사람의 해골이 문제였다. 다이노들은 죽은 부모의 머리뼈를 바구니에 담아 집의 높은 선반에 모셔두고 늘 제사를 올렸다. 다이노들은 죽은 사람의 해골에 두꺼비 상을 새기기도 했다. 부모의 해골에 면으로 짠 옷을 입혀 인형처럼 만들었다. 그리고 늘 몸에 지니며 늘 제사 지냈다. 또 해골 없이 면이나 짚으로 엮은 인형을 만들기도 했다. 그들은 그것을 재미라고 했다. 재미는 죽은 조상의 영이 깃든 것이었고 그러므로 재미는 곧 조상이었다. 다이노들은 그런 재미를 늘 몸에 지녔다. 목에 걸고 다니며 죽은 조상을 기억했다. 사람의 얼굴뿐만 아니라 동물 모습을 한 조각품이나 그림 같은 것들도 재미로 삼기도 했다. 그들이 토템으로 신앙하는 대상들이었다. 이런 것들도 모두 재미라고 불렀다. 지위가 높든 낮든 모든 가시관은 자신을 상징하는 자기만의 재미가 있었다. 그러니 재미는 가시관 수만큼 다양했다. 가시관은 제사 때는 물론이고 일상생활에서 수시로 재미를 매개 삼아 조상신과 직접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조상들에게 뜻을 여쭈었다. 재미를 승계받은 자만이 가시관이 될 수 있었다. 반대로 재미가 없는 자는 가문의 가시관이 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재미에게 조상의 뜻을 여쭙는 소통 의식은 재미를 승계받은 가시관만이 할 수 있는 종교적이자 정치적인 특권이었다. 그들은 재미에 자기 조상을 상징하는 조각을 새겼고, 자기 씨족이 신앙하는 두꺼비, 새 같은 동물을 새겼다. 재미는 카리브 전역에서 암각화로 새겨졌다. 강가의 크고 너른 바위에도, 제례 의식을 치르는 밭batú 주변을 금줄처럼 세운 판돌에도, 석회 동굴에도 재미를 새기고 제를 올렸다. 토기 같은 생활 도구에 새와 거북이 같은 토템을 새기고, 몸에도 동물 문양의 재미를 문신했다. 카리브해에서 옥으로 만든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 탈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인류학자들은 탈도 재미의 일종이고, 종교의식에서 숭배의 대상이었다고 밝혔다. 종족의 운명뿐만 아니라 후계 가시관 선정, 미래의 지위와 건강, 다산과 안위 같은 것들을 재미에게 기원했다. 콜럼버스는 구가나가리 가시관에게 이런 가면을 선물로 받았다고 기록했다. 이 가면에는 눈과 귀와 혀가 금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기독교 종말론자였던 콜럼버스에게 재미는 파괴해야 마땅한 이단, 사탄의 우상이었다. 그러므로 보는 즉시 모두 깨트리고 불태웠다. 그래서 다이노라면 모두 지녔다는 그 많던 재미는 모두 소실되고 박물관에는 극소수만 남아있다.
다이노 사회를 지탱해 준 식용 작물과 나무는 신화에서 태어났지만, 땅을 기름지게 하고 물을 넉넉하게 해 열매를 맺어주는 일은 해와 달이 해주었다. 재미는 해와 달과 인간의 농사일 사이에서 초자연적인 힘으로 조정자로서 역할을 해주었다. 그 조정자는 사람으로 인격화된 신화 속의 신과 다이노 조상신이 합쳐진 존재였다. 그러므로 재미는 다이노 종교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기물이었다. 최고 신성의 재미는 사람 얼굴 모양을 했는데, 조상신이 인격화된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대개는 동물과 인간의 모습이 혼재된 모습이었다. 신화와 신앙과 제례 의식이 섞여서 만들어낸 흙으로 빚은 조각상 또는 무명이나 지푸라기로 만든 인형 같은 상징물이기도 했다. 재미를 중심으로 다이노 사회는 수준 높고 잘 발달한 신정일치의 사회였다. 아메리카 인디언과 카리브 다이노 민족을 연구한 하버드대학의 제시 퓨크스Jesse Fewks는 재미 중심의 다이노 사회 통치 시스템을 재미니즘Zeminism이라고 명명했다.
라스 카사스는 “히스파니올라에는 사원temple이 따로 없었다. 가시관이 사는 집이나 가장 나이 많은 자의 집이 그런 역할을 했다. 가내caney는 귀족들의 집을 말하는데 가내에서 사당 같은 건물을 따로 두어 제사를 지냈다. 특히 코해바cohoba 의식을 가내 사당에서 자주 치렀다”라고 기록했다. 다이노들은 재미로 신주를 삼았다. 지체 높은 니다이노 가문은 조상의 해골로 재미를 만들었다. 낮은 신분의 가문은 동물 뼈와 나무를 깎아 만들기도 하고 무명 피륙을 짜 만들기도 했다. 신분이 더 낮고 가난한 자들은 지푸라기 인형이나 조개껍데기 같은 것들을 이용해서 만들기도 했다. 지체 높은 니다이노들은 따로 사당을 두어 재미를 안치하고 제를 지냈지만, 가난한 나보리야들은 신줏단지를 다락이나 선반에 올려 모시기도 했고, 그마저도 어려우면 벽에 걸기도 했다.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드리고, 나라와 가문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조상에게 아뢰고 그 뜻을 들었다. 다이노들은 죽은 조상들의 혼령이 재미에 들어 가내를 떠나지 않고 자손들과 함께 살아간다고 생각했다. 콜럼버스가 처음 바닷가의 작은 다이노 마을에 들었을 때 집마다 해골이 걸려있다고 했다. 콜럼버스는 다이노들이 사람을 죽여 그 살을 다 발라 먹고 뼈만 남겼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 해골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조상을 모시는 다이노들의 재미였고, 신줏단지이자 위패, 영정이었던 셈이다. 어떤 다이노들은 살던 집의 땅에 죽은 자를 매장하고 함께 살았다. 몇 년이 지나 살이 모두 없어지고 뼈만 남았을 때 유골을 옮겨 이장했다.
청개구리를 토템으로 한 재미 유물도 많이 남아있다. 카리브해 다이노들은 흙으로 만든 둥근 화덕을 불엔burén이라 한다. 남아메리카 인디오들도 화덕을 불엔이라고 부른다. 유가나 옥수수를 빻아 갠 반죽을 불엔이라는 흙화덕에 발라 불에 구워 난 같은 빵을 만들었다. 그들은 흙화덕을 꼭 큰 돌 셋을 세워 걸었다. 남아메리카 인디오들은 지금도 불엔 곁에 늘 청개구리 재미를 모셔둔다. 청개구리는 비를 상징한다. 배가 고파 울던 어린아이들이 청개구리로 변해 비가 오면 운다는 전설을 기억하면서 불에 빵을 굽던 엄마들은 자식들이 배가 고프지 않기를 기원했다. 남아메리카에서 청개구리는 배고픔이나 농사와 관련한 신화에서 아주 중요한 상징이다.
어떤 재미는 머리에 왕관을 두 개를 쓰고 가시관의 집 가내의 지붕 꼭대기에 살았다. 그러다 밤마다 내려와 여자들과 잠자리를 가졌다. 어느 날 적이 쳐들어와 가시관의 집을 불태우자 이 재미는 물로 변해 도망쳤다. 례도에서 어른들이 이 재미에 관한 노래를 불렀고, 이 노래를 들은 아이들이 마을을 돌며 이 재미에 관한 이야기를 노래하며 놀았다. 그 재미는 스페인 침략자들이 쳐들어오자 또다시 도망쳐 산호바닷속으로 숨어버렸고 그 뒤로 지금까지 다시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다이노에 덮칠 불행한 미래를 그렇게 회피해 버린 재미였는데 그 재미를 소유한 가시관도 재미처럼 스페인에 투항하고 부역하여 다이노를 지켜주지 않았다고 한다. 또 어떤 재미는 뱀 같은 동물의 정령에서 재미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재미를 소유한 가시관은 적에게 붙들려 묶여도 매끈해서 잘 풀려난다고 믿었다. 그 가시관은 스페인 침략군과 싸우다 붙잡혀 처형당했고, 그가 묻힌 자리에서 큰 나무의 기둥이 자랐다는 이야기도 전해졌다. 쿠바 사람들은 지금도 나무의 기둥 속에는 누군가, 어떤 신령이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이노에 농사일을 주관하는 유가후과마Yucahuguamá 신은 아주 중요한 신이다. 그는 조물주이자 주식인 유가 농사를 관장하는 신이기도 하고 또 바다의 신이기도 하다. 라몬 파네는 유가후과마를 가리켜 “다이노들은 하늘에 살고, 영원하며, 아무도 볼 수 없고, 시작도 없는 남성 신을 믿는다”라고 기록했다. 이 신은 처음부터 있었던 남성 신 야야가 변한 신이다. 다이노들은 유가후과마 재미를 밭에 묻는 풍습이 있었다. 유가의 신이므로 그가 땅을 기름지게 해 주고 곡식을 많이 맺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풍습이었다. 라몬 파네는 이런 일화를 기록했다. 여섯 명의 다이노가 기독교인의 예수상 몇 개를 훔쳐서 밭에 던졌다. 그런 다음 흙을 덮고 오줌을 싸면서 “이제 크고 실한 유가가 주렁주렁 열릴 거야”라고 말했다. 농부들은 오줌도 자기 밭에다 누는 법이다. 그런 마음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을 밭에 묻었다. 스페인 사람들이 예수야말로 신 가운데서 최고 권능의 신이요, 가장 높은 신이라 하니 그 말을 믿은 다이노들은 예수의 재미를 땅에 던져 묻고 거름 되라고 그 위에 오줌까지 눈 것이다. 이 풍년 기원 의식은 신성모독으로 종교재판에 넘겨졌다. 다이노 여럿이 마을 광장에서 불태워 죽임을 당했다. 죽는 다이노도, 살아 이 모습을 지켜보는 다이노도 왜 불태워 죽임을 당하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라틴 아메리카 역사학자 세르지 그루진스키Serge Gruzinski는 아메리카에서 “우상의 전쟁”이 시작된 사건이었다고 평가했다.
다이노들의 모든 신을 낳은 어머니 신은 본래 있었다. 어머니 여신이 신 중의 최고신이었다. 이것도 모계사회의 한 모습이다. 그 어머니 신을 아타베이Atabey라고도 하고 쥐마고Zuimago라고도 불렀다. “물과 파도를 만들고, 달의 여신이면서, 다이노를 잉태한 여신이고 세상을 창조한 신”이다. 아타베이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면 이티바 가우바바Itiba Cahubaba다. 이 신이 다이노들에게 아이를 점지해 주는 여신이다. 자기 피를 흘려서 다이노 사람과 다이노가 살아갈 땅을 낳았다고 전해진다. 이티바 가우바바의 재미Zemís는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다. 재미에 표현된 눈은 길게 옆으로 찢어져 눈꼬리가 치켜 올라가 있다. 많은 아이를 낳는 자궁은 크게 표현되었고, 아이들을 낳느라 지쳐 쇠약해진 팔은 만삭으로 부른 배를 감싸고 있다. 그리고 자식에게 젖을 먹이는 어미이므로 두 젖꼭지는 크게 표현되었다.
이 여신이 스페인 정복자들의 성모 마리아와 결합했다. 여신은 성모 마리아의 빈껍데기를 집 삼아 자신을 숨겼다. 쿠바의 식민지배자 중 한 명인 오헤다Ojeda가 구에바Cueíba라는 가시관에게 성모 마리아상을 주었다. 그러면서 이 여신이 신의 어머니이므로 앞으로 이 여신에게 기도하고, 이제 재미에게 제사하지 말라 명했다. 몇 년 뒤 구에바가 숲에서 마리아상을 잃어버렸다. 오헤다가 알면 안 될 일이었다. 구에바는 마리아상을 만들어냈다. 이때 만들어진 마리아상은 삼신할머니 이티바 가우바바를 스페인 양식으로 흉내 내 만든, 두 문화가 융합된 새로운 다이노 재미였다. 크리오요 마리아가 탄생했다. 껍데기는 기독교지만 속은 다이노 토속신앙이 차지한 새로운 종교가 쿠바에서 시작되었다. 문화 적응은 고유문화의 정체성을 지키지 못하고 주류 문화에 적응하여 동화되는 것이고, 문화 변용은 새로운 주류 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고유의 정체성과 특성을 유지하면서 통합하는 현상이다. 다이노들은 스페인 기독교에 동화하지 않고 자신들의 재미니즘 신앙을 유지하면서 기독교를 통합해 수용해 갔다. 이런 다이노들의 문화 변용은 쿠바 문화의 근성으로 자리 잡는다. 나중에 흑인들이 들어와서도 이런 다이노 전통을 배웠다. 다이노가 변형해 받아들인 기독교에 흑인들은 아프리카 토속신앙을 통합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쿠바의 기독교가 산테리아다. 그러니까 산테리아는 다이노와 스페인과 아프리카가 섞인 종교다. 쿠바에는 가톨릭을 믿는 국민이 90%, 개신교를 믿는 국민이 10%라지만 산테리아를 믿는 국민은 100%다는 말이 있다. 쿠바 사람들이 교회당의 예수와 마리아를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와 마리아는 그들의 재미의 일종이다. 예수와 마리아 재미에 다이노와 흑인들의 여러 조상신이 숨어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