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메주
메주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다이노 발명품은 메주maize. 옥수수 또는 강냉이를 가리키는 공식 국제어는 메주다. 본디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말이다. 옥수수는 스페인을 통해 유럽에 소개되었다. 그러므로 유럽에서도 다이노들 말을 따라 메주라고 부른다. 메주는 10,000년 전에 고대 멕시코 사람들이 오랜 세월 동안 교배를 거듭해 종자를 개량해서 재배하여 식량으로 먹기 시작한 경작용 작물이다. 옥수수는 벼, 밀, 귀리, 조, 수수 같은 볏목 볏과에 속하는 식물이다. 테오신테teosinte라는 벼 닮은 야생풀이 있었다.
수수 귀가 아이 손가락보다 작은 25mm에 불과한 그저 평범한 풀이었다. 낟알도 단단한 껍질에 싸여 있어서 도구로 깨야 겨우 먹을 수 있었다. 우리가 아는 옥수수와는 유사성을 찾기 힘들 만큼 완전히 다른 종자였다. 그러므로 옥수수는 식량으로 삼을만한 작물이 못되었다. 그러나 테오신테가 같은 벼과 식물임을 알아본 멕시코 원주민들이 옥수수 종자를 개량하기 시작했다. 그해 열린 수수 귀 중에 돌연변이로 큰 귀를 맺은 옥수수를 선택해서 심기를 거듭해서 조금씩 더 큰 종자를 재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수확한 메주에서 가장 크고 굵은 씨알을 골라 처마 밑에 걸어 말려서 다음 해 다시 뿌렸다. 이 방식으로 콜럼버스가 상륙할 때 테오신테는 15cm 정도 길이의 옥수수로 개량했다. 10,000년 세월 동안 이루어낸 종자 혁명이었다. 이들은 옥수수를 가루로 만들어 먹었다. 통으로 삶거나 구워 먹고, 죽을 만들어 먹었다. 콜럼버스의 일지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이 알갱이는 요리해 먹으면 너무 맛있다. 이 사람들은 이것을 통째로 구워 먹기도 하고, 빻아서 죽을 만들어 먹기도 하는데 무엇이든 참 맛있다.”
그보다 3,000년 빠른 1만 3,000년 전 한반도에서는 인류 최초로 벼를 식량 작물로 재배한 농업혁명을 이루어냈다. 2003년 BBC 방송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가 소로리 유적에서 과학자들에 의해 발견되었다'라고 보도했다. 오늘날 세계 인구의 60%가 쌀을 주식으로 먹고산다. 한반도의 벼 종자 개량 방법은 멕시코에서 옥수수를 개량했던 방법과 같았다. 동북아시아에서는 같은 방식으로 보리, 밀, 콩, 수수, 들깨 등도 종자 개량에 성공했다. 재배 농업이 가능해졌으니 더는 떠돌지 않고 정착했다. 인구가 증가했다. 동북아시아 문명을 형성했다. 그때 한반도에서 인류 최초의 농업혁명이 있었다. 아메리카로 이주한 사람들은 새로 정착한 곳에서는 쌀을 키울 수 없었다. 그때 벼 종자로는 열대 지방처럼 더운 곳에서는 다시 잡풀이 되었다. 탄수화물을 먹지 못하면 정착이 지속될 수 없고 종족을 유지할 수 없다. 그래서 멕시코 원주민들은 벼와 콩을 개량했던 실력으로 수수 같은 식물을 콩 닮은 옥수수로 개량해 낸 것이다. 인류사에서 두 번째 농업혁명이 일어났다. 옥수수 생산량이 많아지자 인구가 폭증했고 씨족 마을은 서로 통합되어 군장국가로 발전했다. 옥수수가 마야, 잉카, 아스테카 문명을 키워냈다. 안데스산맥 등허리를 타고 남북 아메리카로 카리브로 퍼졌다. 그때 쿠바 다이노들은 옥수수라 하지 않고 메주라고 말했다.
헐거워진 흙은 햇살과 바람과 물기를 머금었다. 흙을 갈아 두둑을 쌓고 고랑을 파고 이랑을 돋웠다. 갈아 뒤집힌 흙은 보드라이 부풀었다. 씨를 뿌렸다. 씨를 뿌린 다음에는 들뜬 흙을 밟아 다졌다. 찰진 흙냄새가 농부의 마음을 부풀렸다. 다이노들은 옥수수 밭두렁에 콩과 호박도 함께 심었다. 스페인 기록자들은 이런 농사법을 처음 보았으므로 “잡풀을 가꾸는 것 같았다”라고 기록했다. 농사를 모르는 사람 눈에는 “잡풀을 가꾸는” 듯이 보였을 만도 했다. 옥수수 농사는 땅 힘을 많이 소모한다. 콩은 뿌리에서 질소를 고정하여 옥수수가 소모한 지력을 회복시켜 땅 힘을 보충했다. 또 콩은 옥수수를 지지대 삼아 타고 자라니 지지대를 따로 만들어주지 않아도 되는 이점이 있다. 밭 바닥에 너르게 펴진 호박넝쿨은 햇볕을 가리니 잡초를 못 자라게 하고 토질에 영양분을 준다. 이런 농사법은 잡풀을 가꾸는 일이 아니었다. 농업을 혁명한 지식과 경험이 모인 농사법이었다. 다이노들은 옥수수와 콩, 호박을 동시에 농사짓는 방법을 세 자매Three Sisters 농법이라고 했다.
옥수수는 한반도에 명나라를 통해 1700년대에 들어왔다. 이 시기 명나라는 페루에서 생산한 은의 최대 수입국이었다. 볼리비아의 안데스 고산 꼭대기 4,090m에 포도시Potosí라는 광산 마을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고도에 있는 마을이다. 스페인은 이 산꼭대기 마을을 ‘노다지 재Cerro Rico’이라고 불렀다. 포도시는 그때도 지금도 세계 최대의 은 산지다. 포도시에서 캔 은은 2/3가 태평양을 건너 명나라로, 1/3이 대서양을 건너 스페인으로 실려 갔다. 스페인이 은을 팔아 벼락부자가 되었다. 스페인어에는 ‘포도시만큼 가치 있는valer un Potosi’라는 관용어가 있다. 큰 가치가 있다는 뜻의 관용구다. “포도시 은광에서 죽은 인디오 시신을 다리로 놓으면 영국 런던까지 간다”라는 말도 있었다. 스페인 왕에게는 엄청난 축복이었고 노예가 된 다이노 인디오들에게는 요한이 계시한 종말의 현장이었다. 포도시는 광산이 너무 높으니 오르기도 겨우 오를 수 있는 곳이겠거니와 노예로 끌려가면 겨우 살아내기도 힘겨운 곳이었다. 포도시 인근에 있는 암파토Ampato 산은 만년빙에 덮여 있었지만, 빙하가 녹으면서 산꼭대기도 벗겨지고 있다. 1995년 이 빙하를 등정하던 산악인이 어린 소녀 미라를 발견했다. 후아니타Juanita라고 이름 붙여진 12세쯤 되는 이 소녀는 1,440~1,480년 사이에 잉카의 신에게 인신 공양 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입고 있는 옷의 직물로 볼 때 잉카 쿠즈코Cusco 출신이었다. 미국의 유전체연구소 TIGR는 아니타의 유전자 지도상 그녀와 가장 가까운 현대인은 한반도의 한국인이거나 대만인이라고 밝혔다. 섬인 대만에서 페루 포도시까지 도착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동북아시아의 한민족이 그곳에 도착했다고 보는 것이 온당하다. 후아니타의 뱃속에서도 옥수수가 들어 있었다. 후아니타가 암파토 산에 오르면서 마지막 배불리 먹은 음식이 옥수수였다. 잉카인들의 주 식단이 옥수수였다는 뜻이다. 포도시의 은이 명나라로 실려 가던 그때, 세 자매 농법도 함께 따라왔을까. 아니면 동북아시아의 농민들도 스스로 알아냈을까. 마치 카리브 다이노들에게 영농지도를 받은 것처럼 한반도 농민들도 세 자매 농법으로 옥수수를 키웠다. 지금 우리 농촌에서는 옥수수 밭두렁에 콩, 호박을 섞어 키운다. 오늘도 한반도 농민들은 씨를 뿌리기 전에 두둑을 쌓아 이랑을 만들고 고랑을 만들어 물길을 잡는다. 다이노들이 했던 것처럼.
콜럼버스가 상륙한 지 20년 만에 메주는 스페인 본토에서 널리 재배되었다. 메주는 다이노들만큼이나 환경 적응력이 뛰어났다. 이탈리아로 퍼졌고, 아프리카로, 유럽으로 퍼졌다. 오늘날 스페인 남부 광활한 농지는 포도밭과 메주 밭이 많다. 메주는 식품으로서 영양 가치가 밀보다 몇 배나 높다. 비로소 유럽이 배고픔을 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