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 축제
검은 축제
세비야의 가장 큰 축제는 코퍼스 크리스티Corpus Christi, 거룩한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대축일이다. 13세기에 시작되어 기독교에서는 중요하게 여기는 전례다. 콜럼버스가 행진했던 세비야 대성당 앞에서는 드라마가 공연되고, 성스러운 음악에 맞춘 댄스 행렬이 화려하게 행진했다. 행렬의 맨 앞은 10여 명이 깃발로 만든 성체를 들고 춤추고 노래하며 거리마다 행진했다. 이것을 세비야 사람들은 5월 대축제라고 한다.
콜럼버스가 돌아오고 나서 세비야에는 낯선 노예들이 거리마다 가득 넘쳐났다. 북아프리카 전투에서 잡아 온 무어 노예들도 있었고, 그라나다를 떠나지 않은 모슬렘 노예들도 있었다. 다양한 민족과 인종의 “뉴 바빌로니아”라고 불릴 정도였다. 이들은 부두에도, 과달키비르강 강가에서도, 시장에서도, 광장에서도 도시의 명소에서는 어디서든 쉽게 볼 수 있었다. 콜럼버스가 귀환한 뒤로 세비야는 로마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히스파니아가 계획한 대로 명실상부한 메트로폴리스가 되었다. 세비야 인구도 3배 가까이 폭증했다. “세비야와 안달루시아는 이제 더는 지중해의 끝, 땅의 끝이 아니다. 구세계에서 가장 번성하고 선망받는 세상의 중심이 되었고, 신세계로 가는 모든 것은 세비야에서 출발한다”라고 당시의 세비야의 가톨릭 신부는 기록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이때는 세비야가 세상의 배꼽이었다. 세비야 흑인 노예들이 코퍼스 크리스티 축제 행렬을 유심히 보았다. 축제 날이니 흑인들도 나름대로 의상을 갖췄다. 아프리카에서 살았을 때 입었던 옷을 얼기설기 만들어 입었다. 예수의 성체를 들고 행진하는 주인들 뒤로 노예들도 세비야 거리를 행진했다. 자신들의 악기와 곡을 연주하고 리듬에 맞춰 아프리카인 고유의 춤을 추었다. 노예였을지라도 이들에게도 5월의 코퍼스 크리스티는 대축제였다. 이 검은 축제가 금세 카리브로 건너갔다. 쿠바에서도 이 검은 축제 행렬이 이어졌다. 1573년 아바나에서도 성스러운 코퍼스 크리스티의 집단 가무 행렬이 시작되었다.
코퍼스 크리스티 축제가 사라반다를 스페인에서 유행시켰다. 16세기말부터 약 30년간 스페인을 휩쓸었다. 성직자와 귀족, 왕실까지 모두 탐닉하였다. 스페인 왕실은 1583년에 이 춤을 추다 발각되면 채찍으로 때린 다음 남자들은 노예선에 태우는 형벌을 내리고 여자들은 국외로 추방했다. 그러나 춤바람에 휩싸인 대중들의 욕구를 정치로 억압할 수는 없었다. 이 춤을 즐기기 위해 대중들은 저항했다. 이 춤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 춤은 섹스와 애무 행위를 그대로 재현했다. 엉덩이를 이리저리 야하게 흔들어 성행위를 연상하게 했고 심지어 파트너 여자의 젖가슴을 만지기까지 했다. 만지는 것인지 애무하는 것인지는 구분할 수도 없었다. 카디스와 세비야에는 늘 춤추는 유명 연예인이 있었다. 이번에도 셀러브리티는 피부 검은 여자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피부가 그렇게 짙게 검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희지도 않았다. 물라토mulatto는 백인 남자와 흑인 여자가 낳은 혼혈이다. 16세기에 옥스퍼드 사전은 백인, 흑인 외의 새로운 종이라고 분류했다. 1590년, 그러니까 콜럼버스가 카리브를 침공한 지 100년이 지났을 때 새로운 제3의 종 물라토가 유럽 역사에 처음 등장했다. 그 공간은 연예계였다. 카디스에 텔레투사가 있었던 것처럼 아바나에서는 레오노르 리하Leonor Rija가 스타였다. 아바나의 리하가 세비야의 텔레투사가 되었다. 그녀는 포르노를 연기하듯 사라반다를 추면서 노래했다. 그리고 기타를 치면서 퍼커션을 두드렸다. 그녀는 4명의 여자 물라토와 2명의 남자 물라토와 함께 다녔다. 사라반다를 공연하는 팀이라는 뜻에서 밴드라는 단어가 나왔다. 그러니까 세상의 첫 밴드가 사라반다 장르를 노래하는 물라토 밴드였다. 세비야 시 당국이 리하의 공연 회당 금화 8닢ducats에 해당하는 개런티를 주어야 공연을 유치할 수 있었다. 카리브에서 백인이 아닌 유색 노예들이 돈을 벌어 노예 신세를 면할 수 있는 길을 리하가 제시했다. 리하의 사라반다 공연이 ‘거룩한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대축일’ 축제의 하이라이트 행사였다. 1593년 무렵의 코퍼스 크리스티 축제는 사라반다로 뒤덮인 축제였다. 그해 세비야 축제에 흑인 사라반다 공연자가 65명이나 되었다. 사라반다의 비속함에 구토가 날 정도라는 비난도 있었지만, 사라반다 축제를 보기 위해 사람들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1,000년 전의 카디스 스타일은 세비야에서 사라반다라는 불후의 후속작을 낳았다. 1611년에 발행된 스페인어 사전은 ‘이 춤은 너무 사실적이고 또 음탕한다. 몸뚱이를 품위 없이 흔들어대기 때문이다……. 온몸을 움직일뿐더러 두 팔을 최대한 사용하여 묘한 자세로 만든다. 캐스터네츠를 치면서 말이다’라고 기록했다. 종교가 억압한 인간의 육체를 자극한 춤 사라반다를 이제 신은 더는 막을 수는 없었다. 지난날 카디스의 딸들이 로마 남자들의 혼을 빼앗았었다. 또다시 육체와 성을 느끼게 한 이 춤은 이제 세비야에서, 그리고 전 스페인을 강타하더니 음악과 함께 유럽으로 북진했다. 그때도 춤바람은 강하고 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