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탱고

11. 탱고

#251 중력

by 조이진

중력

사과는 익어야 떨어진다. 뉴턴의 사과일지라도 그렇다. 중력도 자연법칙이지만, 익어야 떨어지는 것도 역시 자연법칙이다. 사과를 얻으려는 자는 인내해야 한다. 하지만 사과나무를 흔들어 사과를 떨어뜨리려는 자들도 있기 마련이다. 중력은 미국의 편임을 아는 미국의 아담들은 조급할 이유가 없었다. 사과나무를 흔들어서 쿠바라는 사과를 미국이라는 땅으로 떨어뜨려 자들은 오히려 쿠바에 있었다. 쿠바 부르주아 크리오요들이다. 이들은 설탕과 커피 붐을 타고 상당한 금권을 확보했고, 정치적으로도 대담해졌다. 1810년부터 1820년까지 대략 10년 동안 라틴 아메리카 대부분의 식민지가 스페인에서 독립하는 데 성공하는 동안에도 쿠바의 애덤스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독립이 아니라 미국에 병합되고 싶었다. 노예 때문이었다. 그들은 노예주들이었고, 미국도 노예제를 지속하고 노예가 떠받치고 있는 나라였다. 쿠바 부르주아들은 쿠바가 독립으로 간다면 그 과정에서 어떤 식으로든, 어느 정도든 쿠바의 노예제가 영향을 받을 것을 염려했다. 노예 제도가 폐지되거나 흑인의 지위가 상승한다거나 또는 아이티처럼 노예가 백인을 밟고 우위를 차지하는 사회로 변화될 것을 두려워했다. 그 무렵 스페인 왕실은 쿠바 노예가 정규군 10만 명의 군사력에 맞먹는다고 분석했다.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스페인 아니라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추진하려는 세력도 흑인 노예를 생각하면 감히 독립을 운운하기도 어려웠다. 노예의 파괴력과 노예가 창출해 주는 수익이 쿠바 크리오요들의 독립 의지를 억제했다. 그렇다고 스페인이 계속 지배하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스페인은 이미 영국과 노예제를 폐지하겠다는 조약에 서명했다. 해상에서는 세계 경찰국가인 영국이 쿠바로 들어가는 노예선을 단속하고 있었다. 영국의 늘어가는 압력 아래서 스페인이 쿠바 플랜테이션 소유자들이 필요로 하는 노예선과 노예제를 지켜줄 것이라 믿을 수는 없었다. 혁명이 일어나 독립하면 노예제는 폐지될 것이요 현상을 유지하면 영국이 노예제를 막을 것이었다. 물론 미국도 노예를 수입하지 않는다는 국제법에 서명한 상태였다. 해상의 패자인 영국의 압력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미국 땅 안에 있는 노예는 단 한 명도 해방하지 않았다. 서명은 그저 서명일뿐, 미국 경제는 노예 경제가 떠받치고 있었고 당시의 지구상에서 가장 노예 노동에 의존하는 나라가 미국이었다.


1817년에 스페인은 쿠바와 미국 사이에 자유 무역 협정에 서명했다. 쿠바와 미국을 경제적으로 더 밀착시킬 것이 분명한 자유 무역 협정에 부르주아 크리오요들은 환영했고 독립 추진 세력은 반대했다. 협정 결과 쿠바에서 생산한 설탕의 60%, 커피의 40%, 시가의 90%가 미국으로 수출되었다. 미국과 쿠바 경제가 이 정도로 밀착했으니 쿠바섬이 미국과 공식적으로 결합하는 것이 맞지 않으냐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그럴 때 미국 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가 백악관에서 한 쿠바인을 맞았다. 자신들이 스페인을 축출할 계획을 꾸미고 있으며 이제 거사가 임박했다고 말했다. 놀랍게도 자신들은 독립을 원하지 않고, 스페인과 관계를 청산한 뒤 곧바로 미국의 독립된 1개 주가 되어 미국 연방의 일원으로 병합되기를 원한다고 했다. 먼로 대통령은 곧바로 각료들과 머리를 맞댔다. 국방부 장관이 스페인과 전쟁을 우려했다. 쿠바를 노리는 영국도 전쟁을 걸 수 있었다. 전쟁은 돈이 많이 든다. 각료회의 결과 미국은 당분간은 쿠바를 합병하지 않기로 했지만 여러 경로로 첩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영국에 대한 쿠바인들의 감정이 중요했다. 보고서는 쿠바인들이 영국이 쿠바를 삼키는 상황을 무척 싫어한다는 결론이었다. 영국이 쿠바에 드나드는 노예 거래를 방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영국이 점령하게 되면 노예제를 폐지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시 쿠바 인구의 57%가 흑인이었으므로 쿠바는 흑인 천지가 될 터였다. 백인들이 소수자가 되는 셈이다. 쿠바는 흑인 세상이 될 것이었다. 쿠바인들은 압도적으로 미국에 병합되기를 원한다는 것이 첩보의 결론이었다. 쿠바인들이 보기에 미국만큼은 노예제를 지켜줄 힘과 의지를 갖추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했다. 쿠바 거주 백인의 삼분의 이는 오직 자신들의 안전 문제로 미국이 쿠바를 병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국 말고 영국 같은 다른 세력이 쿠바를 차지하면 노예에 기반을 둔 플랜테이션 사업을 못 하게 될 것이고, 반란이 일어나면 아이티에서처럼 생명이 위험할 것이었다. 미국을 외국 세력으로 보지 않는 쿠바 백인 부르주아들의 속내를 먼로와 각료들은 확인했다. 먼로는 그렇다면 당분간 쿠바를 스페인 치하에 두어도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쿠바는 미국에 잘 어울린다고 확신했다. 아무런 현상을 변경하지 않아도 미국의 이익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때가 1822년 사과가 익어가는 가을 어느 날이었다.

미국 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 쿠바 설탕 부르주아들은 미국이 쿠바를 병합해기를 청원했다.

급한 것 없으니 사과가 익기를 기다리겠다는 먼로의 전략은 오래가지 못했다. 1823년 봄 프랑스가 스페인을 침략했다. 1820년 스페인에서 부르봉 왕가 군주에게 대항한 자유주의 혁명 세력이 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잡았기 때문이다. 이때 스페인은 프랑스의 속국이나 다름없던 형편이었으니 프랑스 군대가 스페인에 진군해 반란을 진입했다. 이미 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지들은 너도나도 독립하고 있었다. 그로기 상태였던 스페인에 진입한 프랑스는 입법기관을 해체하고 자유주의 헌법을 폐지했다. 스페인은 프랑스의 완전한 이중대로 전락했다. 영국은 프랑스가 스페인을 차지하자 프랑스가 스페인이 잃어버린 옛 아메리카 식민지를 도로 차지할까 경계했다. 게다가 러시아마저 스페인이 잃은 식민지를 탐내며 프랑스의 스페인 점유 사건에 개입하려 했다. 이 사건으로 먼로의 내각에서도 토론이 활발했다. 영국이 쿠바를 선점하면 어찌 대응할 것인가가 의제였다. 쿠바를 영국에 넘길 수는 없으니, 전쟁이 합리적인 선택지였다. 쿠바인들에게 선제적으로 독립을 선언하게 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사과가 익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 먼로에게는 둘 다 원하지 않던 방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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