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리브레

13. 리브레

#276 10년 전쟁

by 조이진

10년 전쟁

  “내가 자유인이듯 이제 여러분도 자유인입니다.” 푸에르토리코 독립 세력이 진압당한 지 16일 뒤인 1868년 10월 10일 아침. 쿠바 바야모의 설탕 플랜테이션 소유자 세스페데스가 제 소유의 노예 앞에서 선언했다. 25년간 이름뿐인 여왕의 방탕한 생활비를 대주는 유일한 식민지로 남아있던 쿠바마저도 스페인의 지배는 끝났다며 독립을 선언했다. 독립으로 가는 30여 년의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스페인은 이를 반란이라고 했다. 설탕 공장 계단에서 선언문을 낭독한 세스페데스는 흑인들을 ‘시민’이라 부르며 쿠바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투쟁에 참여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틀 만에 쿠바 독립 전쟁의 영웅 마세오 형제와 막시모 고메스 장군이 합류했다. 새벽마다 힘겨운 노예의 하루를 깨웠던 종이 크게 울려 노예 해방과 쿠바의 독립 선언을 축하했다.

쿠바에서 처음으로 노예를 해방하고 쿠바 민족주의와 독립을 선언한 세스페데스. 콜럼버스 이래 300년간 이어져온 노예 수탈 경제 체제가 무너졌다.

바야모에서 첫 승리를 거둔 쿠바 해방군은 대성당의 제단에 독립 쿠바의 국기를 세우고 주교는 새로운 쿠바를 상징하는 깃발에 축원 기도했다. 붉은색과 흰색, 푸른색으로 그려져 같은 디자인의 깃발이기는 했지만, 필리버스터들이 <뉴욕 선>지 건물에 내걸던 깃발은 아니었다. 세스페데스는 카리다드의 제단 바닥에 깔린 천을 가져다 직접 박음질해 그 깃발을 만들었다. 노예주였던 시민과 노예였던 새로운 시민들, 그리고 그들을 지켜주는 성인 카리다드가 한자리에서 독립을 축원했으니 쿠바의 모든 주체가 투쟁에 참여했다는 요건을 갖추었다. 반란이 시작되었을 때 관리들은 단 며칠이면 반란을 진압할 충분한 병력이 있으니 안심하라고 왕실에 보고했지만, 스페인은 10년 동안 이 반란을 진압하지 못했다. ‘10년 전쟁’은 많은 것을 파괴했다. 사탕수수밭을 따라 이어지는 화염은 자유를 전파하는 봉화였고 110개의 플랜테이션이 있던 어느 도시에서는 10년 전쟁이 끝났을 때 온전하게 남은 설탕 공장은 단 1개뿐이었다. 이 도시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는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도시의 벽과 나무에 빼곡히 박힌 총탄 자국은 치열했던 전투의 음울한 흔적이었다. 횃불은 쿠바섬의 노예제도를 불태우고 쓰러뜨렸다. 1868년에 쿠바 노예 소유자의 노예 해방 선언은 미국과 대서양의 노예 제도 변화가 만들어낸 결과였다. 그해의 미국에서도 마침내 노예제도가 폐지되었고, 동시에 불법이었지만 지속되고 있던 대서양 노예무역도 종식되었다. 이제 쿠바에서도 노예제가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은 부서졌다. 10년 전쟁은 콜럼버스 이후 300년간 지속해 왔던 쿠바 사회의 근본을 뒤집는 사건이었다. 1869년에 독립 정부가 만든 헌법에는 “쿠바공화국의 모든 거주자는 완전히 자유다”. 그러므로 “모든 시민은 해방군의 군인이 될 자격이 있다”라고 명시했다. 노예라는 단어는 사라졌다. 노예였지만 이제 갓 새로 시민이 된 자들을 상대로 한 정치 연설은  “피부색이 무슨 색이든 우리는 모두 형제다”라는 첫마디로 시작했다. “흑인과 백인은 완전히 평등하며 모든 쿠바인은 피부색과 나이와 성별에 구분되지 않고 자유를 위해 싸울 수 있다.” 어제까지 채찍으로 때렸던 자와 그 채찍에 살갗이 찢겼던 자들이 서로 시민이라 불렀다. 백인들이 외치는 하나의 조국과 조국애를 새로운 시민들도 함께 외쳤다. 인종 평등과 자유, 애국심은 쿠바의 단 하나의 단어가 되었다.


자유 시민이 된 흑인 중에 금세 아프로쿠바인의 지도자로 떠오른 인물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뛰어난 혁명지도자는 뒤마의 역사 소설과 아이티 혁명지도자 투생 루베르튀르의 전기와 중남미 해방의 아버지 시몬 볼리바르의 글을 읽으며 성장한 안토니오 마세오였다. 그는 독립혁명이 선언되자 이틀 만에 해방군으로 합류했다. 전투에 능했던 그는 전쟁 개시 한 달 만에 장교로 승진하더니 5년 만에 장군이 되었다. 전투에서 그의 활약이 어찌나 대단했는지 스페인 왕은 그를 체포하면 즉결 처형하라고 명령했을 정도였다.

다운로드 (29).jpeg 안토니오 마세오 장군. 쿠바 독립 투쟁사에서 우리의 홍범도 장군과 비슷한 위치의 군사지도자다.

독립 전쟁은 동부 지역에서는 성과를 내고 있었지만, 해방군은 쿠바섬 중앙의 까마궤이를 돌파해 서부로 나아가지 못했다. 아바나와 마탄사스가 있는 쿠바섬 서부는 미국에 병합을 주도했을 정도로 설탕 생산이 많았고 또 노예가 집중되어 있었다. 노예를 부의 원천으로 삼고 있던 쿠바섬 서부가 노예 해방에 소극적인 것은 당연했다. 반면 큰 설탕 플랜테이션이 적은 동부에는 당시 쿠바의 총 노예 가운데 6%만 분포했다. 세스페데스도 1860년 쿠바섬 전체 1,365개의 플랜테이션 가운데서 설탕 생산량을 기준으로 1,113위에 불과한 작은 플랜테이션 소유자였다. 서부의 노예주에 비해 노예를 해방해도 잃을 것이 적었던 동부 노예주들이 혁명을 주도한 배경이다. 해방군 사령관 막시모 고메스가 마세오에게 서부 쿠바를 공략할 것을 제안했다. 고메스 생각에 마세오라면 군사 500명만으로도 스페인의 방어 선 참호를 돌파하고 카펫처럼 평탄하게 길에 이어진 사탕수수밭을 질풍처럼 휩쓸어 아바나까지 진격할 수 있을 것이었다. 평원에 점처럼 드문드문 솟아있는 제당소도 쉽사리 허물 것이었다. 제당소는 설탕뿐 아니라 노예 저장소이기도 했다. 제당소를 부숴 노예들을 풀어주면 해방군 병력도 늘어날 터였다. 마세오의 군사 능력이야 의심할 여지가 없었지만, 마세오가 전투에서 잇달아 승리하고 빠르게 진급할수록 괴상한 소문이 돌았다. 마세오가 흑인들의 공화국을 세워 스스로 통치자가 되려 한다는 것이었다. 스페인과 미국이 퍼트린 이간계가 작동하고 있었다. 인구의 46%나 될 만큼 노예 비율이 높은 아바나와 마탄사스 지역에 흑인 사령관을 보내 흑인들을 해방하고 그들의 영웅이 되게 하는 것이 온당할까 하는 생각에 백인 지도자들이 빠져들었다. 마세오가 아바나를 차지하고 나서 쿠바섬을 “또 하나의 아이티”로 만들어 투생 루베르튀르처럼 자기가 쿠바의 통치자가 되기로 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인종 전쟁이 쿠바에서도 벌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백인들에게 아이티 혁명은 두려운 선례였다. 그때 보복 학살당한 프랑스인들처럼 되기 위해 해방을 선언하고 독립 전쟁을 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간계가 이겼다. 마세오는 서부로 진군하지 못했고 파죽지세로 아바나까지 점령할 듯 기세를 올렸던 해방군이었지만 공격은 멈췄고 전선은 교착되었다. 고메스는 그의 전투 일지에서 “확실하게 승리할 길로 혁명을 이끌지 못했고, 전망은 어두웠다”라고 썼다. 해방군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마세오의 부대마저도 맥이 풀렸고, 정체된 혁명 양상에 해방군은 지치고 있었다.

이를 알아챈 스페인이 협상을 제안했다. 완전한 독립을 이룰 때까지 협상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고 마주 앉은 해방군은 이틀 만에 스페인의 협상안을 받아들였다. 독립은 인정받지 못했고 정당 설립을 허용하고 반란에 참여했던 노예와 계약 노동자 치노에 자유를 준다는 회유책에 합의하고 해방군은 항복했다. 그들은 독립 대신 평화를 얻어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마세오는 쿠바의 독립도 노예 해방도 받아내지 못한 평화 협상에 동의하지 않고 부대를 소집했다. 백인들은 거의 떠났고 남은 자들은 10년의 전쟁 동안에 진급한 흑인 장교들 일부였다. 완전한 독립과 노예 해방 없이는 평화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며 계속 투쟁할 것을 선언했다. 10년이나 싸웠던 전투였지만 이제 승리를 거둘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마세오는 자메이카로 떠났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13. 리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