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리브레

13. 리브레

#287 군정

by 조이진

군정

  1899년 1월 1일 미군정이 시작되었다. 독립을 주장한 자들과 싸움에서 미국 병합을 꾀한 자들이 승리했다. 노예제 유지를 원하는 대토지를 소유한 부르주아계급이 승리였다. 미국은 상원의 결의안에 따라 쿠바를 식민지로 병합하지 않았고 쿠바 주재 사령군정청에 의한 군정을 통해 사실상 식민지로써 관리했다. 미군정이 군대를 통솔하고 경찰을 지휘하며, 쿠바의 법과 질서를 결정하고 유지했다. 예산을 결정, 집행, 관리하고 장관과 시장을 임명했다. 전쟁으로 파괴된 도시와 도로를 재건하기 위해 동원된 쿠바인들은 새로운 정복자에 의해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필리핀에서 벌써 미군정을 상대로 반란이 계속 일어났다. 필리핀 독립을 위해 스페인에 대항해 싸웠던 이들이 미군정에 맞서 봉기를 일으키고 다시 반군이라는 이름으로 규정되었다. 반군을 진압하고 필리핀에 해군 기지를 건설한 미국은 20세기를 “미국의 세기”로 맞이했다. 필리핀에서 겪은 저항을 쿠바에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미군정은 5만여 쿠바 해방군을 무장 해제하고 해체하는 데 주력했다. 전쟁이 끝난 지금 그들은 모두 무기를 갖고 있었고 또 실업 상태였다. 미군정은 무기를 반납하는 해방군에게 75달러씩을 보상했다. 쿠바 해방군들은 미군들에게 무기를 내놓기를 거부하고 굳이 쿠바인 시장에게 무기를 반환했다. 75달러를 손에 쥔 독립군들은 웨일러의 재집중화로 집도 밭도 모조리 파괴된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미군정은 그들을 지방의 치안을 맡는 자경단원으로 이용해 주로 재산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겼다. 선발된 자들은 자비로 말과 복장을 사야 했고, 미군정에 복종을 맹세해야 했다. 뉴욕타임스는 잘 차려입은 자경단 사진을 게재했다. 누더기를 기워 입고 싸웠던 쿠바 해방군의 사진과 나란히 비교했다. 재집중화로 기아에 허덕였던 사진을 기억하는 독자들에게 뉴욕타임스는 미군정이 통치하는 지금은 쿠바에서 중요한 일들은 처리되었고, 무장 세력도 해체되었고, 쿠바 사회가 안전하게 유지되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재집중화 때 스페인 편에 섰던 가톨릭교회는 불신의 대상으로 전락해 종교 기능을 상실했다.


  ‘국가를 도덕적으로 파멸로 몰고 가는… 미치고 사악한 식민 야망’이라고 미국의 제국주의를 비난하는 카네기를 중심으로 조직된 반제국주의 동맹은 미국의 식민주의 팽창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고 쿠바인들에게도 자극이 되었다. 마침 쿠바에서도 미국이 쿠바와 푸에르토리코, 필리핀, 괌 등을 하나의 주로 묶어 미국의 연방으로 편입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던 참이었으므로 미국이 섬 몇 개를 묶어 섬 주를 하나 만든다 해도 유럽 국가들이 광대한 아프리카를 쪼개 나눠 갖은 땅에 비하면 ‘제국’이라 부르기에는 한참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쿠바에서 다시 완전하고 즉각적인 독립을 요구하는 집회가 전국에서 열렸고, 대중들은 “쿠바 리브레”, “독립이 아니면 죽음뿐이다” 같은 문구가 쓰인 배너를 들고 거리를 행진했다. 호세 마르티에게 ‘쿠바 리브레’는 스페인뿐만 아니라 미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기도 했다. 쿠바 지도자들은 미국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냈다. 쿠바는 단 하나의 구호로 통합되고 평화로웠다. 완전한 평화가 왔으므로 미군정이 쿠바를 떠나야 할 때였다. 미군정이 쿠바를 관리하는 개념으로 ‘자주적인 정부 수립 능력’으로 바꿨다. 쿠바 사람들이 국가를 운영할 능력이 확실히 검증되었을 때 쿠바를 떠나겠다는 것이었다. 그 운영 능력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미국이 자의적으로 판단할 것이라는 것은 모두 알 수 있었다. 미국은 새로운 쿠바 군정 사령관으로 우드를 보냈다. 쿠바인들이 스스로 정부를 운영할 능력을 갖추었는지 그가 채점자였다. 우드는 쿠바에서 식민지 총독으로 군림했다.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 전 분야에 걸쳐서 그가 하고 싶은 대로 실행했다. 쿠바의 이익을 줄여 미국의 이익으로 돌렸다. 그는 토머스 제퍼슨이 독립을 선언했을 때부터 품었던, 그러나 사과가 나무에서 분리되기를 기다리며 오랫동안 미뤄왔던 쿠바 지배의 꿈을 명백히 드러내 보였다. 우드가 지금 막 카리브의 바다에 떨어진 사과를 미국의 바구니에 담기 시작했다.

1899년의 아바나 거리

  쿠바에 도착했을 때 우드는 쿠바가 독자적인 정부를 구성하고 자치할 수 있는 능력을 준비해 주는 것이 자기 소임으로 미국의 건국 경험에 비추어 정부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선거를 통해 지방 정부를 먼저 조직해야 하며 누구에게 선거권을 줄 것이며 또 출마자의 자격 요건을 어떻게 정할 것인지를 밝혔다. 그는 일정 수준 이상의 재산을 소유하면서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남자에게만 투표권과 공무담임권을 인정한다고 했다. 이는 여자는 물론이고 사실상 대다수 흑인 남자에게도 투표권을 부여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독립의 꿈이 깨졌을 뿐 아니라 마르티가 그토록 주장했던 인종 통합의 국가 이상도 부서졌다. 이제 미국식 인종차별주의가 쿠바에 이식될 참이었다. 쿠바인들은 이것은 사실상 스페인에 대항해 독립 투쟁해 온 수십 만 명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으려는 의도라고 하며 극렬하게 반대했다. 우드의 의도는 그것이었다. 결국 250달러 이상의 재산을 소유한 남자,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남자, 그리고 쿠바 해방군으로 복무했던 남자 셋 중의 하나를 충족한 21세 이상의 남자만 투표권을 주기로 합의했다. 그때 쿠바에는 250달러를 가진 흑인은  아무도 없었다.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흑인도 흔하지 않았다. 제헌 회의를 구성할 선거는 평화롭고 질서 있게 치러졌다. 미군정은 선거로 선출된 사람들을 모두 “즉각적 미군정 철수를 주장하는 극단적이고 과격한 혁명 분자”들이라며 깎아내렸다. 소수의 선거구에서는 폭력이 개입되기도 했다. 미국은 아직 쿠바가 자치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증거가 필요했었다. 선거에서 승리하자마자 쿠바민족당은 매킨리 대통령에게 미국이 쿠바에 개입했을 때 의회가 결정한 대로 이제 자치 정부가 합법적으로 구성되었으니 미국이 쿠바를 쿠바인에게 넘겨주고 지금 쿠바를 떠날 때라는 내용의 문서를 보냈다. 지방 선거 한 달 뒤 미군정은 헌법의 틀을 잡아 쿠바를 건국할 절차를 결정하고 어떤 체제로 쿠바를 통치할지 국가의 작동 원리를 결정할 제헌 회의를 소집하기로 하고 회의에 참여할 대표단을 선발하는 일정을 공표했다. 공화국 건설이 시작된다고 들떴던 쿠바인들에게 의심이 일었다. 미국이 발표한 지침에 제헌 의회는 미국 정부가 향후 쿠바 정부에 형성하고자 하는 관계에 부합하는 헌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조항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주권을 가진 새로운 나라의 헌법이라면 쿠바 국민의 주권으로 선거를 통해 구성되는 정부가 미국과의 관계를 설정할 일이었다. 그러나 미군정이 발표한 지침으로는 미군정에 의해 소규모로 선발되는 제헌회의가 쿠바와 미국의 미래 관계를 결정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 내용이 헌법에 명시된다면 미군이 계속해서 쿠바를 점령하게 될 것이고 더군다나 영구적인 체제가 될 것임을 암시하는 문장이었다. 제헌 회의가 열리기 전에 미국은 쿠바 점령을 끊고 떠나라는 시위가 꼬리를 물었다. 그러나 미국은 미국이 받아들이고 승인해 줄 수 있는 제헌 헌법이 아니라면 헌법은 결코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헌법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미군정도 철수하지 않을 것이었다. 미군정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제헌 회의 대표단 선거에서도 “즉각 독립”을 외치는 급진적인 인사들이 당선되었다. 미군정은 의원 대부분이 비렁뱅이들로 채워졌다고 비아냥했다.

미군정청에 몰려가 항의하는 쿠바 시민들. 쿠바는 대혼란에 빠졌다.

  우드는 백인이 먹는 물은 흑인이 먹는 물과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무렵에 미국 대법원에서는 이미 흑인차별을 금지한다는 판결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그의 생각에 그런 판결은 미국을 잘못된 곳으로 끌고 가는 판결들이었다. 쿠바에서만큼은 그 잘못들을 바로 잡고 미국이 잃어버린 가치를 복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쿠바인을 국민이 아닌 피부색으로 보았다. 쿠바 독립운동으로 노예를 잃어버린 노예주들의 분노에 공감하는 그에게 쿠바 해방군은 열등하고 노예여야만 하는 검은 인종 니그로일 뿐이었다. 미국은 쿠바인들을 ‘국민’으로 보지 않고 흑인들의 ‘인종’ 저항으로 보았다. 미국인에게 쿠바인들은 ‘니그로 피가 섞인 열등한 잡종’이었다.  미군정에서 혜택을 받은 백인들이 독립 전쟁에 참여한 흑인들의 참여율과 역할을 깎아내리기 시작했다. 미국의 연구비를 받은 학자들이 안토니오 마세오의 유해를 파내 머리뼈의 크기를 쟀다. 그의 머리뼈가 흑인의 해부학적 특징보다 백인의 해부학적인 특징을 더 많이 갖고 있다는 보고서를 내 ‘백인다움’의 우월함의 증거로 삼았다. 역사적으로 쿠바는 사람의 ‘인종’을 구분할 때 프랑스가 개발한 피부 색조표나 머리카락을 기준으로 결정해 왔다. 눈으로 보이는 색을 기준으로 삼던 인종 구분은 이제 미국식으로 바뀌었다. 유색인의 피가 한 방울만 섞여도 백인이 안 되는 규칙이었다. 이 규칙대로라면 쿠바에서는 백인은 한 명도 있을 수 없었다. 모든 쿠바인은 ‘니그로 거나 니그로와 유사한’ 자들일뿐이었다. 그러니 미국에서는 흑인으로 분류될 사람일지라도 쿠바에서는 백인일 수 있었고, 쿠바에서는 백인일지라도 미국에서는 흑인으로 분류될 수도 있었다. 미군정이 쿠바의 집권 세력을 포함한 모든 주도 세력을 결정하면서 미군들은 피부색을 기준으로 기회를 주었다. 정치 세력은 물론이고 돈을 벌 기회도 색깔에 따라 부여했다. 피부 검은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부여해주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스페인을 축출하기 위해 싸웠던 해방군들이 스페인을 위해 부역한 자들에게 다시 복속되었다. 심지어 스페인 군인 출신이 미군정 휘하에서 그 옷을 그대로 입고 다시 경찰과 군대로 복귀해 장악했고 최고위에서 미국인들이 그들을 지휘했다. 쿠바인들은 독립 이후 스페인과 청산해야 할 문제들을 말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공무원, 상업, 전문직은 모두 백인들에게 돌아갔다. 독립 세력보다 스페인 자본은 여전히 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고, 자본과 상업도 스페인 출신들의 손아귀에 있었다. 백인에게 대든 유색인을 처벌한 스페인 법도 바뀌지 않았다. 쿠바인은 불탄 설탕 공장 시설을 재건할 자본이 없었다. 미국의 자본이 잿더미 가격으로 땅을 대량 사들였다고 쿠바인들은 땅을 잃었다. 그런 식으로 미국 자본이 쿠바에 쏟아져 들어왔다. 유럽 자본도 뛰어들었다. 설탕, 담배, 철도, 광산, 은행 등 쿠바 산업의 대부분을 미국 자본이 장악했다. 그들은 설탕 산업 재건에 집중했다. 이전에는 설탕 플랜테이션이 없던 오리엔테 지역에도 미국인들이 설탕 생산시설을 만들었다. 전쟁 전과 비교해 설탕 경작 토지가 늘었고, 남은 숲은 불타 민둥산으로 바뀌었다. 다시 설탕 생산량이 증가해 전쟁 이전의 수준으로 커졌고, 소유주만 스페인인에서 미국인으로 바뀌었을 뿐 노동자들의 피부색과 처지는 같았다. 미군정이 토지를 조사하고 주인을 정했다. 노예로 살았던 쿠바 민중 대부분은 땅문서라는 개념조차 몰랐다. 제도를 모르고 글을 모르는 쿠바 민중들은 땅에서 쫓겨났다. 쿠바 해방군 지도자 막시모 고메즈가 죽은 1905년에 미국인이 쿠바 토지의 60%를 소유했고 쿠바 사람이 주인인 쿠바 땅은 25%에 불과했다. 미국 자본이 쿠바 노동자와 빈민들의 단결권을 인정할 리 없었다. 인종차별 없는 새로운 쿠바를 꿈꾸며 쿠바 해방군을 이끌었던 흑인 지도자들도 백인 뿐인 새로운 미군정 체제에서 아무런 할 일이 없었다. 함께 싸웠던 백인 부하들 가운데는 지방 경찰서에 자리 만들어준 미국인 지휘관에게 충성하며 스페인 사람에게 몰수한 흰 집으로 퇴근했다. 전국 경찰에서 흑인은 1%도 되지 않았다. 흑인 장군들은 빈민가 판잣집에 살아야 했다. 미군정은 백인 부대와 흑인 부대를 별도로 만들었다. 물론 백인의 승진 속도가 빨랐다. 인종 통합을 상징했던 쿠바 해방군은 그렇게 해체되었다. 1898년에 처음으로 아바나에 전동열차가 다녔다. 미국 자본은 대규모 플랜테이션을 소유하는 것은 물론이고, 설탕을 항구까지 실어 나를 철도를 건설해 운영했고, 그 사업에 은행이 자본을 대고, 통신업 등 각종 이권 사업을 모조리 독점했다. 매춘과 마약, 도박장 같은 전형적인 사업에 투자한 마피아들은 벌써 쿠바를 ‘파라다이스’라 부르고 있었다.

다운로드 (30).jpeg 1900년 아바나 바다의 모습. 미국 자본은 이 해에 말레콘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1900년 크리스마스 날에 아바나와 플로리다 키웨스트 간에 전화가 개통되었다. 쿠바에 투자된 미국의 자본을 보호하는 것은 미국의 쿠바에 대한 주요 정책이었다. 아바나에 하수 시설이 설치되고 상수관이 새로 깔렸다. 가로등이 불을 밝혔고, 천연가스와 전화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1898년 아바나에 첫 자동차가 수입되었다. 1899년에는 말레콘 건설을 시작했다. 1900년 크리스마스 날 아바나와 키웨스트가 첫 전화 통화를 했다. 말레콘 건설이 시작된 그해 아바나에 등록된 23세 미만의 매춘부는 559명이었다. 미국 위생 관리기관은 등록되지 않은 숫자가 10배가 넘었을 것으로 보았다. 타콘이 대극장을 짓고 도로를 확장한 1830년대 뒤로 스페인은 아바나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만 착취만 했다. 쿠바에 근대화가 시작되었다. 미국 자본에 의한, 미국 자본의 이익을 위한, 미국이 주도한 근대화였다. 미국에 기생해야 하는 쿠바. 이때 미국은 카리브해를 ‘미국의 호수’라고 불렀고, 호수 한가운데 섬 쿠바를 ‘앤틸리스의 진주’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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