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 소셜클럽
소셜클럽
독립을 위해 수 십만이 죽었고, 질병과 기아로 고난을 겪었어도 스스로 통치할 수 없다는 것을 쿠바인들은 알았다. 이제는 스페인이 아니라 마르티의 ‘괴물’ 미국과 무장 투쟁하는 수 밖에는 없었다. 미국이 개입하면 쿠바는 영영 독립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호세 마르티의 불길한 예감이 섬을 짓눌렀다. 1901년 쿠바 공화국에서 두 명이 입후보한 첫 번째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한 명은 10년 전쟁 때부터 줄곧 세스페데스와 함께 해방 투쟁에 참여했고, 호세 마르티가 죽었던 첫 전투의 사령관이었으며 혁명 정부의 대통령을 역임했던 바르톨로메 마소Bartolomé Masó였고, 또 다른 한 명은 호세 마르티가 죽은 뒤 쿠바 혁명당을 이끌었던 에스트라다 팔마로 10년 전쟁 동안 쿠바 공화당의 대표였던 그는 미국에 망명해 20년 이상 살며 호세 마르티와 함께 쿠바 정치 혁명에 앞장섰다. 미국 시민권자인 그는 무장 혁명을 통해 독립을 달성하려는 호세 마르티의 노선에 반대하고 쿠바 부르주아의 이익을 중시하고 미국에 친화적이었다.
혁명 임시 정부의 외교관으로 워싱턴 DC에서 활동하는 동안 쿠바를 돈으로 사려는 미국 금융자본의 로비를 받았고 뉴욕 신문은 그를 쿠바의 대표적인 지도자로 보도했다. 호세 마르티가 죽자 쿠바 혁명당 당수가 된 그는 미국이 인도주의적 가치에 바탕으로 해 쿠바에 개입할 것을 촉구하고 플랫 수정안이 의회에서 통과되도록 결의문을 내고 지지했을 만큼 대표적인 합병파 인사였다. 미-서 전쟁이 끝나자마자 그는 쿠바 해방군을 해산하며 미군정과 호흡을 맞췄다. 미군정은 마소가 당선된다면 미국이 영구적으로 쿠바에서 철군하지 않을 것이라며 마소를 압박해 선거를 1주일 앞두고 마소를 후보 사퇴시켰다. 단독 출마한 에스트라다가 대통령이 되었다. 선거 기간 내내 뉴욕 자택에 있었던 에스트라다는 단 한 번도 쿠바에 입국하지 않았다. 에스트라다가 집권하자 미군은 철수했다. 미국은 에스트라다를 통해 쿠바를 통치할 수 있었고, 필요하다면 언제든 쿠바 정부를 해산할 수 있었다. 에스트라다 행정부에서 등용된 흑인은 아무도 없었다. 스페인 정권도 아니었지만 스페인 관료들이 대부분 요직을 유지했다. 게다가 에스트라다 정부는 거액의 보조금까지 제공하면서 스페인인들의 이주에 힘썼다. 스페인 사람들이 좋은 일자리를 차지했고 흑인들은 또다시 스페인 사람 상전에게 복종해야 했다. 쿠바의 피부색을 하얗게 바꾸겠다는 에스트라다의 표백whitening 정책이었다. 마침 세계 1차 대전에서 패배한 오스만 제국이 몰락하는 과정에서 튀르키예와 아랍계, 그리스, 유대인들도 혼란을 피해 쿠바에 왔다. 스페인 노동자들은 취업 여건에서 흑인에 비해 절대 우위에 있었고 입국하자마자 상류 사회에 진입할 수 있었다. 이들이 몰락한 쿠바 가톨릭교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카탈루냐 지방을 중심으로 확산하고 있던 공산주의와 아나키즘에 대한 공감과 생각들도 함께 쿠바에 들어왔다. 쿠바인들은 법적으로는 백인과 평등하다지만, 현실은 일자리도 없고 차별당하고 정부직에서 철저하게 배제당하고 독립한 공화국 정부로부터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돈은 백인들에게만 흘러갔고 흑인들에게는 기회가 없었다. 스페인의 식민치하와 달라진 것은 없었다. 해방군에서 흑인들은 보병의 대다수이기도 했지만 사령관들도 거의 다 흑인들이었다. 그러나 20세기가 되었을 때 흑인 가운데 교육받아 정부직에 임명되거나 상업과 전문직에 종사하는 흑인은 거의 없었다. 1907년 인구센서스 자료에 의하면 그때 흑인 법률가는 4명이었고 의사는 9명뿐이었다. 다만 음악 분야만은 달랐다. 종사자의 절반이 흑인이었다.
그 시대에는 세계의 모든 것이 항구에 모이고 소통되었고 아바나는 여전히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였다. 20세기가 시작될 때 아바나는 라틴 아메리카 음악의 산실이었다. 전쟁의 잔해 속에서 아바나 경제가 다시 회복되면서 아바나 항에는 노동자들이 몰렸다. 선착장에서는 룸바가 계속 변화하고 있었다. 아직 라디오 방송은 가능하지 않은 때였고 리코딩 산업도 유아기였으므로 환락가의 음악에는 라이브 뮤직이 필수였다. 환락가는 가난한 흑인들에게 뮤지션이라는 일자리를 주었고, 춤추는 곳에서는 계급과 계급이 뒤섞였다. 상위 계급 사람들은 환락가에서 최신 유행 음악을 접할 수 있었다. 큰 항구가 대개 그렇듯이 아바나도 창녀촌이 골목마다 가득 찼다. 댄스홀에서는 밴드가 연주했고, 부끄러운 척하던 몸 파는 아가씨들은 쪽문을 열고 손님을 데리고 나갔다. 댄스 교습소에서 춤을 추는 소녀들이 다 그렇지는 않았지만 ‘춤 다음의 약속’을 많이 해야 돈을 잘 벌 수 있었다. 그러므로 댄스 교습소는 섹스와 음악 산업에서 중요한 교차로였다. 그 무렵 브라질의 우범지대는 삼바 춤을 만들어냈고, 아르헨티나에서는 부둣가 창녀촌에서 선원들과 흑인 창녀들이 하바네라보다 빠른 탱고를 추어 밀롱가 탱고를 만들어냈다.
에스트라다의 표백정책으로 급증한 스페인 이민자들이 출신 고향에 따라 향우회를 만들었다. 갈리시아, 카탈루냐, 아스투리아스 등 바스크 지역 출신들이 유독 끈끈했다. 이들이 건축비가 많이 드는 호화로운 네오바로크 양식의 건물들을 지어서 향우회 본부 건물로 사용했다. 향우회 건물에서는 고향 사람들끼리 고향의 명절을 즐겼고, 매일 밤 사교 모임을 열어 춤을 추었다. 그런 건물들 중에는 5,000 쌍의 남녀를 수용할 댄스홀을 갖춘 건물도 있었다. 이것들이 소셜클럽의 전형이었다. 소셜클럽에서는 고향의 전통 춤도 추었지만 단존과 하바네라도 추었다. 쿠바에서 가장 오래된 맥주 회사는 아바나 알멘다레스 지역에 거대하고 사치스러운 정원을 개장했고, 선별된 고객들을 초대해 밤의 파티를 열었다. 숲이 우거진 이곳은 습하고 찌는 듯한 카리브의 여름에도 선선할 만큼 시원한 곳이다. 여러 맥주회사들이 이 마케팅을 본 따 알멘다레스에 여러 맥주 정원이 문을 열었다. 1920년대에는 이들 맥주회사의 정원에 동시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이 15,000명이나 되었다. 그곳에서 매일 밤 무도회가 열렸다. 낮에 시가 공장에서 퇴근한 가난한 뮤지션들이 돈을 벌기 위해 무대 뒤에서 음악을 연주했다. 밴드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도 부에나 비스타라는 소셜클럽에 속한 클럽 전속 밴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