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말레콘

14. 말레콘

#298 마차도

by 조이진

Julio Antonio Mella

마차도

1925년 마차도가 설탕 경제 호황으로 번영을 누리던 때 첫 임기를 시작했다. 주요 정당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메노칼을 누르고 쿠바 5대 대통령에 선출된 그는 쿠바를 ‘아메리카의 스위스’로 만들겠다고 공언했고 실재 타콘 총독 이래로 쿠바를 가장 많이 바꿔놓은 지도자였다. “물, 도로 그리고 학교”라는 선거 구호대로 그는 야심 차게 여러 공공사업에 착수했는데 섬의 서쪽 끝에서 동쪽 끝 산티아고를 거쳐 바라코아까지 1,250km에 이르러 전국의 주요 도시를 모두 연결하는 고속도로부터 건설했다. 마차도는 미국의 자본을 들여와 카지노와 호텔을 지었다. 그 사업들은 마피아들이 가장 원하는 사업이다. 마피아들은 마차도의 주머니를 잘 채워주었다. 아바나는 마피아들이 사업하기에 ‘파라다이스’였다. 이런 대형 공공 건설 사업이 마차도 임기에만도 700건이 넘었고 사업비가 수백억 달러였다. 그 가운데는 1,600만 달러 사업비의 엘 카피톨리오 건설도 포함되어 있었다. 타콘 총독이 하지 못했던 일을 마차도가 실행했다. 

<타임>지에 실린 마차도. 그는 적극적으로 미국 마피아들을 끌어들여 쿠바를 마피아의 천국으로 만들었다.

쿠바를 대표하는 ‘카지노 데 라 플라야’도 이때 세워졌다. 아바나대학교의 정문 입구 계단을 최고급 대리석으로 치장했다. 설탕으로 호황을 누리는 쿠바 경제와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자신감이라고 마차도는 자랑했다. 대형 사업을 발주할 때마다 마차도와 주변인들은 부유해졌다. 실제 집행되는 공사비보다 뇌물로 되돌려 받아 착복한 돈이 더 많았다. 시티뱅크 같은 미국 은행들에서 부채를 끌어 공사자금을 조달했고, 쿠바 정부가 지급을 보증했다. 쿠바 국민이 떠맡을 채무는 늘고 있었다. 뉴욕의 시티뱅크는 모기지론의 담보권을 실행해 쿠바의 많은 부동산을 차지했고 특히 여러 제당 공장이 시티뱅크의 소유로 넘어갔다. 권위주의 통치와 그런 정부가 벌이는 적극적인 공공개발 사업은 미국이 가장 원하는 지도자 상이 었다. 이 약탈 통치자는 부정부패로 조성한 통치자금을 풀어 군부와 경찰을 통제했고 군과 경찰을 도구로 삼아 정적에 대한 정치 테러와 국가 폭력을 일삼았다. 그가 집권한 지 몇 달 만에 마차도를 비판하는 만화를 실은 신문의 편집자가 대문 앞에서 살해당했다. 스스로 이권을 챙기는 카르텔 구조가 순환되면서 약탈 정치의 독재 체제는 유지되었다. 미국은 그 순환을 미국의 힘으로 관리하고 미국의 자본을 투자해 미국의 이익을 만들어냈다. 마차도와 독재정권을 지탱하는 군부는 모든 이권을 장악했다. 학교를 운영했고 식품제조업을 했고, 고기 유통업, 우유 제조업도 교통운송업도 군부대가 소유했다. 마차도가 집권해 도둑 정치를 할 때 쿠바는 혁명 운동이 대중화되었다. 파업이 늘어났고 노동조합은 공산주의적 구호를 외쳤다. 노동운동 탄압은 독립 이후 쿠바에서는 일상적이었지만 마차도는 탄압이 아닌 전쟁을 선택했다. 취임 후 짧은 기간에 노동운동 지도자 여럿이 살해되었다. 자신보다 2년 전에 이탈리아 총리가 된 파시스트 무솔리니를 정치 모델로 삼았던 그가 취임한 지 2년 만에 마차도는 다시 개헌의회를 소집했다. 선거를 치르지 않고 그의 임기를 2년을 더한 6년으로 연장하는 개헌을 하기 위해서였다. 마차도는 무솔리니의 통치술에서 배운 개인 숭배와 국민 조직화 같은 통치술로 독재정치 체제를 구축했다. 우윳빛 대리석 계단을 밟고 앉은 아바나대학 학생들은 부패한 독재 정권을 타도하자고 외치는 정치집단으로 변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마차도에 반대하는 정당을 설립했다. 대학은 폐쇄되었다. 많은 국민이 아직 마차도를 지지하기는 했어도 마차도를 타도하려는 운동은 빠르게 확산했다. 마차도 타도 운동가들은 공산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같은 여러 사상 부류들이 뒤섞여있었지만 스페인 독립전쟁 때부터 쿠바 국민을 묶어온 민족주의가 반 마차도 투쟁을 하나로 통합했다. 

아바나의 엘 카피톨리오. 마차도 시대에 건설되었다.

1920년대에 미국은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파나마 운하를 비롯해 수십억 달러의 미국 자본을 중남미 국가에 투자해 중남미 경제를 사실상 미국이 통제하고 있었다. 거액을 투자해 파나마 운하를 완성한 미국은 유럽 세력이 파나마 운하 가까운 곳에 군사 거점을 세울 가능성에 극도로 예민했다. 그래서 아이티를 점령하고 있던 독일이 1차 대전을 일으켜 아메리카까지 관여할 경황이 없는 상황이 되자 미 해병대가 아이티를 점령했고 내친김에 미국과 합병을 논의해 온 도미니카 공화국까지 점령했다. 쿠바를 방문한 수십만 명의 미국인 가운데 최고위 인사는 쿨리지 미국 대통령이었다.

1928년 니카라과에 파병된 전함 텍사스호를 타고 아바나에 도착한 쿨리지의 팔짱을 마차도의 부인이 끼고 쿨리지의 부인은 마차도 팔짱을 끼면서 아바나의 대통령궁을 걸었다.

마차도와 쿨리지. 그가 최초로 쿠바를 방문한 대통령이었고, 두 번째로 방문한 미국 대통령은 2016년 오바마였다.

술이 합법인 쿠바의 마차도는 그에게 럼을 권했고 쿨리지는 미국은 술을 마시지 않는 금욕의 나라라며 사양했다. 마차도는 쿨리지의 방문에 맞춰 베다도의 나시오날 호텔 앞 말레콘에 미국 전함 메인호 희생자 위령탑과 공원을 세웠다. 그 공원에는 초대 쿠바 미군정 총독 레오나드 우드의 흉상도 설치되었다. 두 정상은 메인호 폭발로 시작된 미국의 긴 점령 문제나 쿠바의 기괴한 독립  상태에 대해서는 입에 올리지 않았다. 쿨리지는 재임하는 동안 해외국가로는 유일하게 쿠바를 방문했다. 그 제막식 때문이 아니고 21개 국가의 정상들이 참석한 제6차 범 아메리카 회의 때문이었다. 쿨리지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정신 아래 하나의 정신적 유산을 이어받은 북미, 중미, 남미, 카리브 등 우리 모든 아메리카는 영원히 하나로 결속하여 있고, 우리는 완전히 평등하다…. 그렇기에 작고 약한 나라라 할지라도 여기 모인 나라 모두는 가장 크고 가장 강한 힘을 지닌 미국과 완전히 똑같은 권리와 권위를 갖는다’라고 연설했다. 그러면서 쿠바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30년 전만 해도 쿠바는 외세에 지배당했다. 혁명으로 나라는 찢겼고, 충돌은 끊이지 않았고 모든 것은 파괴되었다…. 오늘 쿠바는 주권을 지닌 독립 국가가 되었다. 쿠바 국민이 꿈꾸었던 안정된 정부를 이루어냈으며, 국민은 투표를 통해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 쿠바는 국제사회에서 존경과 찬사를 받는 나라가 되었다”라고 했다. 그해 1928년에 쿠바는 선거를 치렀다.

아바나 나시오날호텔 앞에 세워진 메인호 희생자 위령탑. 지금은 탑 위 독수리를 제거해 버렸다. 쿠바는 미국을 그렇게 기억한다.

1924년 대선에서 압도적인 표 차로 당선된 마차도 대통령은 부패하기는 했어도 인프라를 대대적으로 건설하는 등 나름의 성과가 있는 대통령이었다. 그는 당선되었을 때는 재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공약했었지만, 집권하고 나서 생각을 바꾸었다. 약속을 어기지 않으면서도 정권을 연장할 방도로 재임은 금지하되 단임 임기를 6년으로 연장하는 개헌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쿨리지는 마차도의 이런 속셈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고서도 쿠바의 선거제에 대해 매우 민주적이며 국민의 의사를 잘 대변한다고 칭찬해 주었다. 두 나라 대통령은 급히 확산하고 있는 반정부 정서나 반대자들에 대한 정부의 불법적이고 지나친 탄압에 대해서는 외면했다. 쿨리지가 도착하기 전날 마차도 정부는 대대적으로 반정부 인사들을 체포했다. 쿨리지 환영 행사장 앞에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한 명의 스페인 공산주의자, 또 한 명의 폴란드 공산주의자 그리고 두 명의 쿠바 학생 운동가가 미 제국주의에 반대한다는 내용의 대자보를 붙였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쿨리지가 탄 비행기가 쿠바를 이륙하기도 전에 그중 한 명의 시체가 죄수를 묶는 무거운 쇠사슬로 묶인 채 모로 항 입구에서 파도에 씻기면서 발견되었다. 사체는 껍질과 살이 찢겨나간 상태였다. 물어뜯긴 스페인 공산주의자의 왼팔은 그날 밤 어느 낚시꾼이 잡은 청상아리의 배 속에서 소화도 되지 않은 채 발견되었다. 그 사건과 관련해서 마차도가 지시한 일은 아바나 앞바다에서는 상어 낚시를 금한다는 조치뿐이었다. 아바나 사람들은 다른 세 명도 사슬에 묶인 채 산 채로 모로 성 지하 감옥의 수문으로 내던져졌을 것이라고 수군댔다. 쿠바 사람들은 이 잔인한 사건에 치를 떨었고, 정부 측 인사들을 상대로 보복했다. 쿠바는 보복을 보복으로 응징하는 정치 폭력이 순환되었다.

홀리오 메야Julio Antonio Mella. 반독재 반미 투쟁을 하다 쿠바에 공산주의를 도입한 학생운동가. 마차도 정권에 의해 살해되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과 멕시코 혁명이 일어났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도 학생들이 봉기했다. 라틴 아메리카는 혁명의 열기에 끓어올랐다. 마차도 정권과 반미 반제국주의 투쟁에 앞장선 집단은 아바나대학생들이었다. 신도시 베다도와 센트럴 아바나를 연결하는 곳에 있는 아바나대학은 넓은 폭으로 만들어진 계단을 올라야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다. 이 계단에서 학생들은 반독재 반미 정치 연설과 집회를 열었고 정부 당국은 학생 소요에 대응해 휴교령을 내렸다. 이 시기에 플랫 수정안 폐기를 요구하며 아바나대학의 학생운동을 이끈 주도자가 메야였다. 카누 대회 우승자였고, 뛰어난 농구선수이기도 한 그는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야학에서 쿠바 역사와 노동자들의 권리, 국제관계 같은 과목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뜻을 같이한 동지들을 모아 즉각적이고 대대적으로 반미 반독재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1925년 메야가 쿠바 공산당을 조직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성공한 뒤 1920년대에 쿠바에도 공산주의라는 단어가 지식 계층의 주제로 떠올랐고 1925년에는 쿠바 노동자연대라는 기구가 결성된 때였다. 레닌의 혁명 노선을 따르려 했던 그는 멕시코에서 독일 공산주의자가 주도한 <반제국주의 동맹>과 <소비에트 연맹>의 멕시코 회의를 주도했다. 메야는 멕시코 공산당 기관지에 마치도 정권과 그를 지원하는 미국 쿨리지 대통령을 맹렬히 비난하고 그가 지켜본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라는 샴쌍둥이 괴물을 신랄하게 비난한 글을 실었다. 메야를 비롯한 친공산주의 성향 운동가들에게는 두 개의 적이 상정되었다. 첫째는 ‘양키 제국주의’를 축출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쿠바의 주권을 수호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친미 꼭두각시 독재 정권을 타도하는 것이었다. 쿠바의 강렬하고 긴 반미 투쟁의 역사가 이때 시작되었고 그 흐름은 오늘날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제 곧 일어날 쿠바의 1933년 혁명과 1959년의 쿠바 혁명은 이 극렬한 반미 반독재 투쟁의 결정판이었다.

  메야가 암살당한 1929년 9월에 다우 존스 지수가 폭락하고 긴 경제 공황이 시작되었다. 3년 동안 주식 가치의 83%가 먼지가 되었다. 1차 세계대전 뒤로 부가 넘실대던 미국의 ‘광란의 20년대’가 무너졌다. 미국에서도 카를 마르크스의 예고대로 자본주의 경제는 실패했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같은 시기에 레닌이 러시아에서 혁명에 성공한 뒤로 공산주의 운동이 세계에 널리 퍼지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뉴딜정책과 금주법 폐지를 공약으로 내건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당선되었다. 국제적인 공산주의 혁명의 열기는 미국을 포위하고 있었고, 독일에서는 히틀러가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세계 설탕 가격이 폭락했고 미국의 대공황은 미국 경제에 의존적이었던 쿠바는 설탕과 시가 수출에 큰 충격을 받았다. 미국 자본에 의존한 건설도 중단되었다. 쿠바에서 순환되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설탕 공장은 노동자를 대량 해고하고, 임금도 삭감한 것도 모자라 설탕 생산량을 줄이기 위해 고용 기간인 수확 기간도 2개월로 줄였다. 1930년에 사탕수수 노동자 임금은 하루 80센트로 1년 전 2.50달러에 비하면 턱없이 줄어들었다. 그나마도 사탕수수를 수확하지 않는 10개월 동안은 다른 벌이가 없었다. 베고 남은 사탕수수 껍데기를 빨며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공무원을 해고하고 임금을 삭감했고, 병원도 우체국도 폐쇄했다. 급여를 한 푼도 주지 못하는 달도 잦아졌다. 정부는 이 시기를 이용해 집회 시위를 금지했으나 학생과 노동자들은 집회 시위를 계속했다. 독립 이후에 태어나서 30여 살이 된 젊은 그들은 자동차를 보았고, 전화를 사용했고, 라디오를 들어 다른 나라는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게 된 자유를 경험하고 있는 세대였다. 20여만 명의 노동자들이 임금을 달라고 파업을 했다. 6개월 동안 임금을 받지 못한 교사들도 파업을 예고했다. 여러 곳에서 폭탄이 터졌고 사람들이 죽었다. 선거 때는 노동자들에게 파업할 권리를 완전히 보장하겠노라고 외쳤던 마차도가 교사들에게 파업하면 군대를 배치하겠다고 경고하며 주요 신문을 폐간하고 쿠바의 유일한 대학이자 군부와 함께 쿠바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정치기관이었던 아바나 대학을 폐교했다. 심지어는 아바나 최상류 층의 사교 모임이자 미국 관광객들의 중요한 휴양 공간인 요트 클럽마저도 회합을 못하게 했다.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를 우려한 마차도는 아예 모든 학교를 폐쇄했다. 교육받지 못한 어린 학생들은 폭력을 배웠다. 계엄령이 선포되고 헌정이 중단되었다. 폐간된 신문이 15개에 이르고 아바나 대학 학생회 간부 전원이 체포되었고 교수 85명이 체제 전복 선동  및 음모자로 기소되었다. 가장 강력한 마차도 타도 투쟁 집단은 학생들이었다. 그런 학생운동의 리더 중에 흑인은 없었다. 흑인은 아바나대학에 입학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인들은 흑인들이 마차도를 지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는 흑인들도 백인들과 다름없이 마차도를 거부했다. 마차도는 학생들의 집회를 해산하는 데 실패했고, 학생들은 반정부운동에 더 집중했다. 시골의 들판에서는 농민들이 사탕수수밭을 불 질렀다. 1930년 12월 말레콘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호텔 나시오날Hotel Nacional이 그랜드 오픈했다. 대공황 이전에 착공한 호텔은 관광 수입이 삼 분의 일로 줄어든 대공황의 한복판에서 문을 열어야 했다. 이 호텔을 끝으로 아바나의 호텔 건설 붐이 끝났다. 20년간 설탕 경제를 누린 쿠바의 거품도 녹았다. 마차도는 ‘특수 수사부’를 설치하고 고문 기술자 수를 늘렸다. 공권력으로 살해되는 피의자 수가 늘어났다. 반정부 세력은 지하로 숨어들었고, 폭력을 폭력으로 대응했다. 마차도의 고문 책임자는 지나가는 자동차에서 쏜 총에 맞아 길거리에서 죽었다. 그 치안 책임자는 상원의장이기도 했다. 마차도를 직접 살해하려는 시도도 몇 차례 있었다.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이 아바나를 소용돌이에 빠뜨렸다. 그 소문의 끝은 미국이 또다시 쿠바에 해병대를 보내 점령할 것이라는 관측이었다. 다시 미군정이 시작되면 마차도는 하야하게 될 것이었다. 현직 뉴욕 시장이 마차도의 후임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돌았다. 그러나 마차도는 1931년 크리스마스이브에 자신은 계속 대통령직을 수행할 것이며 1935년 5월 20일 정오에 퇴임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단 1분도 더 하지 않고 단 1초도 덜 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미국 신문들도 쿠바의 혼란을 보도했다. 극심하게 부패한 마차도 정권에서는 생필품조차도 공급되지 않았다. 버스에 갈아 끼울 바퀴가 없어서 화가 난 버스 기사가 충동해 1933년 3월 버스 기사들이 파업을 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다른 직역의 노동자들이 동조 파업에 돌입했고 철도 노동자, 택시, 트럭 기사, 열차 운전사, 쓰레기 수거 노동자들이 연대 파업에 가담해 모든 산업 분야를 망라한 전국적인 총파업으로 이어졌고 도시는 마비되었다. 가게는 문을 닫았고, 신문들도 윤전기를 세웠다. 아바나는 숨 쉬는 공동묘지였다. 도시마다 중심 광장에서는 “마차도는 퇴진하라”라는 구호가 하늘을 울렸고 총에 대검을 낀 경찰들은 실탄이 든 탄창을 만지작거렸다. 사람들은 마차도가 이번 시위는 막지 못할 것이라고 소곤댔다. 매일 폭탄이 터졌다. 17차례나 폭탄이 터진 날도 있었다. 마차도를 지지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 사이에 주고받는 보복 테러가 반복되었고 실종과 살해 사건은 일상의 현실이었다. 관용이 관용을 낳는 대신 쿠바에서는 폭력이 폭력을 낳았다. 아바나의 무도회장은 미국 카우보이 영화의 선술집처럼 총탄이 불을 뿜고는 했다. 쿠바는 국민과 마차도 정부가 대항하는 내전으로 빠졌다. 음악도 우파의 음악과 좌파의 음악이 달랐다. 19세기에 식민주의를 인정하고 미국과 병합을 추구한 자본가이자 인종 분리주의자들이었던 기득권자들은 감상적으로 사랑을 노래하는 과히라와 볼레로와 19세기의 단자 음악을 즐겼고, 반제국주의 독립을 추구한 사회주의자들이자 인종 평등을 추구하는 진보주의자들은 흑인들의 리듬과 멜로디를 담은 노래와 춤을 추었다. 좌파들은 그런 음악을 ‘모든 쿠바인의 음악’이라고 불렀다. 음악을 비롯한 쿠바 예술계는 이때부터 좌파 성향으로 치우쳤고, 20세기 쿠바 역사에서 예술의 경향을 관통했다. 쿠바가 이런 상황이었어도 뉴욕에서는 크리스마스 홀리데이 시즌이 다가온다며 크루즈 패키지 관광 상품을 파는 광고가 신문 하단의 광고면에 매일 실렸다. “쿠바를 즐기자”라는 헤드 카피가 붙은 광고는 아바나의 카지노와 경마도 여행 패키지에 포함되어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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