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 포크
포크
대공황이 깊어지니 미국은 더는 쿠바에서 뮤지션을 데려다 녹음하지 못했다. 쿠바에는 녹음산업도 스튜디오도 없었으므로 가수들이 LP를 판매한 수익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고, 리코딩 겸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기 위해 뉴욕에 가는 일도 없어졌다. 영화 같았던 쿠바 뮤지션의 뉴욕 시대는 짧았다. 정치적으로 극심한 혼란에 빠진 쿠바에서는 극장도 거의 다 문을 닫았다. 라디오는 몇 시간 동안 전파를 내보내도 돈이 들지 않았고 또 돈을 내지 않고도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일할 곳을 잃은 뮤지션들이 라디오 마이크 앞에 모여들었다. 돈 없는 대중들은 라디오 앞에 서면 음악을 들을 수 있었고, 극장이나 클럽에 갈 수 없어도 길거리 모퉁이에서도, 집에서도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라디오에서는 출생의 비밀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가장 인기가 좋기는 했지만 음악 프로그램도 편성이 많았다. 뉴욕에서 공연할 기회가 사라진 쿠바 음악을 라디오 쇼가 살려주고 있었다. 라디오는 대중들의 음악적 취향도 만들어갔다. 호아킨 코디나라는 기타리스트이자 가수가 진행한 “트로바도르 코디나”라는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이 인기가 좋았다. 이 프로그램에 기타를 연주하는 사람과 가수로 구성된 2인조 듀오 수 백 명이 출연했다. 기타만 연주하면 되었으므로 오케스트라처럼 리허설이나 복잡한 세팅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대중을 금방 즐겁게 해 줄 수 있었다. 뮤지션이 받는 보상은 여성 방청객들의 환호와 신청곡을 받는 일뿐이었다. 가끔은 팬들이 보내주는 감수성 짙은 편지를 받기도 했고,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물건을 보내주는 팬도 있었다.
1930년대에 스페인은 내전 중이었지만 스페인의 클래식 기타는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손톱 없이 치는 타레가의 주법으로는 기타는 아름답기는 했어도 여전히 음량이 작아 살롱음악이라는 인식을 벗지 못했다. 세고비아가 막 타레가의 문하에 들어가려 할 때 마침 타레가가 죽었고, 세고비아는 독학으로 새로운 연주법을 개발했다. 손톱을 길러 손톱으로 치는 주법으로 기타의 음량을 키웠다. 그런 세고비아가 세계 투어 중이었다. 마차도가 모든 학교를 닫은 시기에 성장한 청소년들은 정치깡패가 되거나 음악을 하는 길뿐이었다. 기타는 음악으로 가는 가장 쉬운 길이었다. 쿠바의 기타리스트들은 교육을 받지 못하고 독학으로 연주법을 터득하며 가수의 노래에 맞는 연주법을 개발했다. 타레가와 세고비아 스타일의 클래식 기타 연주법을 쿠바 대중음악에 맞춰 변화시켰고, 1930년대 후반까지 쿠바의 기타 연주 스타일이 정립되었다. 그것은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스타일이었고, 쿠바 스타일의 기타 연주법에 관한 용어는 스페인의 정통 클래식 기타 학교에서는 용어조차도 없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쿠바 트로바도르의 기타 연주가 뿌리가 되어 1960년대 미국 포크folk 기타의 연주법이라는 열매를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