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문제를 찾아내는 동물일까

by 팔로 쓰는 앎Arm

묘하게 불편하다면 타인도 불편함을 느끼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어른의 세상에선. 사람은 바보가 아니니까. 몇 개의 조직을 거치며 찾아낸 건 사람은 참 갈등을 좋아하는 동물이구나 하는 점이다. 안 그래도 되는데 편을 가르고 안 그래도 되는데 정치질을 하며 안 그래도 되는데 지적질을 해댄다. 이쪽저쪽 사람을 가르는데 도가 튼 건가 사람들을 왜 그리 여유가 없을까 따위의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아서 그냥 도망쳐버린다. 대화를 시도해서 이뤄지기라도 하면 다행이다. 이건 정말 군대문화 때문일까? 대화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집단이 대다수다. 갈등 없는 조직은 죽은 조직이다. 맞다. 근데 갈등을 위한 갈등 말고 발전을 위한 갈등이길 간절히 바란다. 정치질해서 자위하기 위한 갈등 말고 말이다. 그런 자들과 얽히니 소름이 돋는다. '세상에'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수년간의 생활 결과 절대로 사람은 선의를 알아채는 동물도 아니며 그걸 알아채고 선의로 보답하면 뒤통수를 충분히 맞을 수 있다는 것, 알았던 사람이더라도 일할 때는 철저히 뒤통수칠 수 있을 만하다는 것 등을 배웠다. 이쯤 되면 어른의 눈이 갖고 싶다. 저 사람을 파악한다는 건 오만이지만 어느 정도 사람을 보고 이렇겠구나 가늠할 수 있는 현명함을 가질 수 있다면 좋겠다. 오만이나 꼰대 말고. 현명한 눈. 혼자서만 참고하고 혼자서 조심할 수 있는 그런 적당한 눈 말이다.


유튜브를 켜지 않으면 잠을 잘 못 자는 때가 종종 있다. 적당한 소리로 가리지 않으면 마음이 안정되지 않을 때도 많다. 라디오는 무섭다. 어쩐지 저 사람을 믿는다는 것 같아서, 그 사람이 언젠가 내려놓거나 사건이 터지거나 하면 상처받을 게 두려워서, 등등이다. 그냥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답습하고 싶지 않은 경계가 괜한 걱정거리를 만들기도 할 테다. 유튜브를 틀고 밝은 에너지를 들으며 잠드는 건 단순한 이유다. 행복한 기운이라도 얻으며 위안을 얻고 싶다. 가장된 것이라도, 대리만족이더라도 말이다.


이른 아침 거리를 걷다보니 이번 주말 날씨가 참 좋았다. 날씨 이야기는 친하지 않은 사이의 인사와 같다는 누군가들의 말이 순간 휙 지났다. 다시 단풍나무를 보았다. 어느새 가을이 왔다. 좋아하는 계절이다. 단풍나무를 보며 오랜만에 운동화를 신고 걸으려니 생각나는 얼굴들이 있었다. 이 얼굴은 보고 싶고, 이 얼굴은 보면 되고, 이 얼굴은 보고 싶지만 보면 안 되고, 이 얼굴은 볼 수 없는 얼굴이고. 그랬다. 마음에 지나는 몇 명 중에 한 명이 간절히 떠올랐으나 그것 또한 취함이므로 절대로 절대로 연락은 해서는 안 되었다. 그건 멍청한 짓이니까.


보고 싶은 사람을 보고, 하고 싶은 운동을 하고, 마음껏 곁의 사람과 기뻐할 권리는 생각보다 그리 쉽게 누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제 어른의 사회로 넘어온 이상 그런 건 없었다.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없으나 스물셋, 스물다섯 후반의 나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다. 마음껏 기뻐하던 기억, 동질감을 느끼던 기억, 미래를 논하던 기억, 푸른 새벽달을 보며 바다를 보고 내일을 얘기하던 기억. 미치도록 우울했지만 다른 내일을, 누군가와 함께 그려볼 수도 있겠다는 그냥 막연하고 근거없는 설렘들. 지금 보면 어리고 어린 모습도 분명하지만 그게 그 시절의 값이니까. 이젠 갈 수 없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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