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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로 쓰는 앎Arm Nov 05. 2018

아침에 눈을 뜨면 두려운 게 싫어서 잠을 안 자

글을 쓰고 싶다는 건 오랜 희망이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꽤나 시끄럽고 당당한 소녀였는데 그 와중에 글을 몰래 끄적이곤 했다. 내 안엔 이야기가 넘쳤다. 이야기를 그저 옮기면 되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알맞게 덜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실은 이 때는 살아있었을 자유로운 글 근육 따위는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단문을 지향하다가 최근의 매체에서 여러 경험을 한 후에는 다시 쓸데없는 살이 많이 붙어버렸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그냥 그러려니 하게 되는 것이다. 한 번씩 자괴감이 밀려 오다가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마는 것은 나의 늙음인가 혹은 내가 그토록 경계하던 것인가. 아니면 나는 온전한 그러려니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수없는 불면의 밤을 보내며 고통스러워 하리라.     


사람과의 교류에서 친할수록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피곤한 부류로서, 친해졌다는 명분 하나로 함부로 선으 넘어 들어오는 자들에 대해 아직도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른다. 또는 어린 시절부터 나를 따라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그저 단단히 굳어져 신경쓰지 않는다고 믿었는데도 이따금 말같잖은 상황에 처하면 이들을 동등한 친분을 맺은 인격으로 대우해줘서는 안 되는 것인지, 호구짓을 하고 있던 건지 또 다시 경계하게 되더라. 나는 자에게 끊임없는 질문을 던질 뿐 답은 내 안에서 아직 제대로 들려오지 않았다.     


이미 버린 인간관계를 다시 줍는 것만큼 멍청한 짓이 없더라. 그러나 삶은 혼자 살 수 없는 거라는 생각 때문에 꾸역꾸역 그들을 참아내는 일이 내겐 버겁더라. 나랑 안 친하잖아. 나 모르잖아. 뭘 알아. 내가 만만하니까. 무례한 자들의 행태를 참아주다보면 결국 피곤하지만 젊은 내가 참자, 예쁜 내가 참자, 능력있는 내가 참자 따위의 나를 사랑하는 과한 마음으로 합리화를 하더라. 상황을 도망치는 방법 중 하나로 자리잡은 셈이다.     


한 번 호구잡힌 사람은 영원한 호구일까. 호구잡힌 사람은 호구잡힌 걸 알면서도 호구잡히고 있는데 왜일까. 그가 지향하는 건 대체 뭘까. 나는 내가 너무 어렵다. 책임감에 버둥거리면서 때때로 공포를 느끼는 데 거기에서 벗어날 생각을 안 한다. 그 명분. 그 책임감. 아침에 눈을 뜨면 느끼는 그 공포들 때문에 나는 때론 하루종일을 자기도 했다. 또는 잠을 아예 자지 않았다. 그 버릇은 수년째 계속되고 있다. 심해지면 심해졌지 나아지진 않는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희망이라는 걸 삼켜보면서 그저 정신을 저기 어디쯤 놓고 살아보려 한다. 살아질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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