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가 거짓말을 하는 걸 알면서 듣는 건 고역이다. 그가 내게 친구의 얼굴을 하고 있을 땐 더 그렇다. 자존심은 세고 자존감은 낮기 때문에 그의 모순을 지적하는 건 싸움의 시작이 될 게 뻔하다. 그래서 이 경우 연락을 끊거나 어떤 결단을 해야만 한다. 문제는 그와 보내온 세월이다. 세월이 너무 길어 그를 단번에 끊어내기 힘든 상황이다. 함께해온 세월 때문에 참는 것도 몇 번. 도대체 어떻게 해야할지 모를 때는 그냥 웃으면서 현상을 합리화한다. 그래, 나를 너무 좋아해서 그럴 거야. 아니, 시간이 흐르면 본래 모습으로 돌아갈 거야. 한편으론 두렵다. 이게 원래 모습이었던 걸까?
그러다가 다시 집중한다. 같이 있을 때 좋았던 것도 많잖아. 친구가 내게 줬던 기쁨을 생각하자. 그러다 다시 소름이 돋는다. 친구가 내게 했던 사랑한다는 말, 집착한다는 말, 이상한 욕들. 자기 혼자 그러다가 다시 왔던 사과의 메시지. 왜 자꾸 이런 사람이 꼬이는 걸까? 따위의 생각을 하다가 혹시 다른 사람들도 그런 친구를 가졌는데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걸까? 하고 결론을 내린다. 그래. 나도 그렇게 결말 짓자.
나이가 들어갈수록 친구의 모습들이 변한다. 어떤 선배는 친구라는 존재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너무 목맬 필요 없대고 누구는 아기 낳으면 달라진대고 누구는... 아서라. 다 무슨 의미랴. 내 현실에 집중하자.
그러다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한다. 현실에 집중하지 말고 흘려 보내자. 그저 쳇바퀴처럼 돌면서 잠깐만 생각을 버려보면 괜찮아질까? 나도 모르는 상황들을 마주하고 나서는 그 다름에 놀라고 호기롭게 만들어둔 상황들에 내가 공포를 느낀다.
확실히 지쳐있거나 늙었거나 둘 중 하나다. 이렇게나 혼란하지 않았다. 그저 할 일을 알았다. 뭘 해야 할지 딱 정해져 이었고 나는 그저 그걸 혼자 별 생각 없이 했다. 내 스스로에게 퀘스트를 주고 해내던 일상. 그렇게 점들을 이어 선을 하나 굵직하게 그리고 나니 중간에 흘렸던 눈물들 혹은 묻어뒀던 감정들이 뒤늦게 따라온다. 괜찮다고 했지. 묻어두자고 했지. 그런 것들이 그저 둥둥 떠오른다. 이것은 내가 선을 하나 그어서 안정감에 무의식이 찾은 또 다른 퀘스트일까.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