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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로 쓰는 앎Arm Sep 12. 2019

여유는 불편을 낳는다?

언젠가 한 독서모임서 이런 주제가 나온 적 있다. "부채감을 자극해 보는 이의 죄의식을 야기하는 구호단체의 텔레비전 광고, 과연 옳은가?" 당시 나는 이 주제로 두 시간씩 "그래선 안 된다"를 역설하는 그들의 이야기에 어쩐지 조금은 질렸는데, 그건 그들이 사회 지도층이어서도 아니고 듣기에 말도 안 되어서도 아니다. 어쨌든 사람의 1인으로 견해라는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주장에 일견 동의하는 바, 그들의 말을 위한 말하기 혹은 진심을 다한 역설 따위가 부담스러웠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마음 한 구석이 어쩐지 불편했는데 그것은 그 전에 만났던 누군가의 한 줄 따위가 생각나서였다.


"유리천장을 논하는 사람들은 유리천장 위에 있는 사람들이다. 페미니즘을 논하는 사람들은 실제 고통받는 이들보다는 따뜻한 방에서 공부만 한 사람들이다." 일견 과격해보이는 이 주장이 왜인지 뇌리에 강하게 남았는데, 나는 그 이유를 아직도 잘은 모르겠다. 그리고 그가 말한 사실에 동의하지도 않는다. 실제 행동하며 하루를 버텨내는 수많은 이른바 '지식인'들을 무시하고 메시지에 치중한 행위라고도 여긴다. 그가 말하고 싶었던 건 아마, 생업전선서 하루 하루를 달리는 이들에겐 그런 논쟁 따위는 사치로 혹은 배 부른 자들의 이야기로 들린다는 사실이었을 거라고, 추측만 해볼 뿐이다. 그러면서, 나는 사회서 '지식인'의 이름을 쓴 사람들의 역할에 혼란을 겪는 것인데, 그것은 여유있는 자들이 투쟁해야 한다는 생각과 그 투쟁이 실제 피해자를 배려한 형태가 아니라면 그게 대체 무슨 소용이냐는 새생각으로 뻗어나가는 것이다.


여유있는 투쟁. 어쩌면 앞뒤가 안 맞아 보이는 이 말 속에서 내가 하고픈 말은 그저 이거다. 있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고통받는 자가 있다면 고통받는다는 사실에 의심하기보다 그를 도울 생각을 먼저 하는 것. 물론 덮어놓고 부채감이 자극돼 지원하면 그게 무슨 의미냐는 혹자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보지만, 글쎄. 덮어놓고 의심부터 하며 고통받는 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냐는 게 그냥 지금 드는 생각이다. 그래서 어쨌든, 나는 당시 독서모임서 그런 저런 얘기들을 듣고서 어쨌든 개인이 느낀 부채감에 대한 불편을 고통받는 이들에게 돌리는 것보다야 부채감이 자극돼 우리가 문제를 해결한다면, 그것이 낫겠지 않겠느냐고, 그리 말을 했더랬다. 그러니까, 따순 방구석에 앉아 자극되는 부채감에 언성을 높이는 것보다는, 당장 굶고 있다고 노래하는 그들에게 얼마라도 주고 내 그 알량한 부채감을 잠시나마 희석하는 게 서로에게 좋지 않느냐는 말이다.


물론 구호단체나 기타 등등의 단체에서 잠시나마 일, 그리고 지원(apply 말고 support)도 해본 1인으로, '믿지 못한다'는 말은 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나, 글쎄. 어디나 사람 사는 일이고 사람이 하는 일이라면 알맞게 대우하고 돌아가게 둬야 하는 건 또 맞지 않느냐 말이다. 10원짜리 하나까지 열심히 이고 들어와 세고 그 결과를 기록하던 사람도 있고, 뒤가 구린 것처럼 의심되는 행동들도 분명 있으나, 그렇다면 그 행동을 자제시킬 일이며 검증해낼 일이지 귀찮으니 싸잡아서 그 업계는 더럽고 나쁘다고 하는 것만큼 무책임한 해결책이 또 있느냐고 묻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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