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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로 쓰는 앎Arm Sep 12. 2019

덮어놓고 남의 성공을 재단하는 행위에 대해

우선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성공이란 형태는 매우 다양해서, 어쨌든 누군가는 A를 성공했다 여길지라도 A는 그렇지 않게 생각할 수 있다. 또, 누군가는 A가 간 길이 너무 힘들어보여서 그게 가능하냐는 의심을 품을지라도 A는 그 길이 전혀 힘들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은 행복하다고 웃으며 말할 수 있다. 그러면 누군가는, A에게 자격지심을 느끼며 A의 행동을 깎아내리거나 '그냥 마음에 안 든다' 따위로 의심하며 떠들거나, 또 다른 누군가는, A가 알고보니 그런 사람이었더라며 A에게 더 반할 수도 있다. 그러니, 사람 by 사람인 세상에서 너무 마음을 닫을 필요가 없다는 주장에 일리가 있어는 보인다.


그러나 A가 살아가면서 긍정적 누군가를 만나 인연을 쌓는 '어쩌다 한 번'에 기대하면서 여기저기 마음을 열고 다니기란, 굉장히 위험한 행동일 것인데, 그러니 누구도 A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는 것이다. A 역시 함부로 안심해서 뒤에 몰려올 폭풍 혹은 자신에게 박힐 상처를 스스로 만들지도 모를, 누구들의 모임에 함부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A는 자연히 사람이 싫어지고, 곁의 사람에겐 뭐든 빼주며, 그러다 홀로 껍데기만 남은 채 그저 '그러려니'를 곱씹는 것이다.


A는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쳐 그것을 티내는 이들에 대해 그저 접근하지 않고 엮이지 않는 것을 배워왔다. 꽤나 쓸모있게 잘 배워왔다고 자신했는데도, 종종 몰려오는 허탈함이나 두려움에 A는 그저 뒷걸음질치고 싶다가도, 자신 안에서 들려오는 "그래선 안 돼" 따위의 외침 "신사가 되어라, 젊은 양반" 따위의 외침에 그저 억지로 힘을 충전하여 다시 사람 앞에 나서곤 하는 것이다. 그 뒤에 몰려오는 엄청난 공황이나 우울은 A가 굳이 불특정 다수나 매우 친한 이들에게 말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A가 늘 느끼는 것은, 문제는 혼자 품으면 혼자 치유하지만 누군가에게 말하는 순간 문제는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누구들은 어쨌든 남이니, 인간의 본성을 믿지 않는다는 게 A의 주장이다.


그러면서도 A는 때로 결이 같은 사람을 만나면 찰떡처럼 친해지는데, 그러면서 집에 오면, 그에게도 역시나 A의 온전한 모습을 보일 수 없을 테니, 혼자 또 선 긋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A는 사랑이 싫고 사람도 싫다. 그저 기대는 것은 몇 년을 함께 지내며 온전해진 몇 개의 우정인데, 그 대상들과 시시콜콜 모든 것을 공유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사라져버린다면 A는 안 그런 체 해도, 또 마음이 심하게 무너져 내릴 것임을, A는 스스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A는 버텨야 한다. 쉬어도 된다고 말하는 고마운 이들에게 '그런 걱정은 기우였다'는 것을 알려주어, 스스로가 여전히 매력적인 A로 남기 위해, A에게 기대하는 이들을 충족해 궁극적으로는 A가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을 위해, A는 근원 모를 공황을 느끼다가도 여전히 버티고 강하게 웃고 있을 수밖엔 없는 것이다. 별 것 없는 세상서, 행복해지려 하는 일은, 때로 공황을 끌고 오기도 하고, 때론 두려움을 가져오기도 하지만, 여전히 A는 그래도, 세상은 살 만하니 더 가보자는, 사랑에 충만한 마음을 스스로 잘 충전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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