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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로 쓰는 앎Arm Oct 14. 2019

아무도 지킬 수 없다

그가 죽었다.


유달리 빛났던 연예인 A. 관심이 좋은 직업이라지만, 직업 전에 사람이 있는데, 혹자들은 직업 먼저 봤다. 그러니 A에게 직업윤리를 운운하며 A의 선택을 일탈로 몰았고 A의 사진들에 '왜 이러냐'는둥 '이해하지 못할' 행동이라는둥 엉망인 평을 내렸다. 온라인매체가 수두룩한 근래, 속칭 '언론사'인 체하는 사이트들의 기사는 그런 혹자들의 반응을 그대로 제목으로 내세웠다. A에 대한 '가짜 여론'은 그렇게 만들어졌고, 배포됐다. 반성은 가해자 말고 피해자가 했으며 피해자를 응원하는 이들은 가해자가 해야 할 반성을 대신 '해줬다'. A에게 미안하다며.


A가 환한 미소를 보이면 '예쁘긴 한데' 따위의 글이 수두룩했고 A가 그러든 말든 왜 기사를 담아내냐는 여론도 대세를 이뤘다. 어쨌든 이런 저런 물결 속에서 A는 소비됐다. 입길에 올랐다. A는 사람인데 많은 이들의 뇌리 속에 A는 그저 하나의 사물로만 존재했다. A가 죽은 후, A가 가는 길을 모자이크해 올려대는 이들. 그 모습을 아무렇지 않게 촬영하고 글을 쓰고 온라인에 업로드를 하고 데스킹을 받고 편집자의 손을 거치고. 그 모든 과정서 수많은 시스템 혹은 이름들이 있었겠지만, 누구도 A를 보호해주지 않았다. 그 역겨움은, '아이고 인간아' 하다가도 '사람이라면 어찌 그러랴' 하는 것으로 결국은 귀결되는 것이다.


A가 무엇을 하든, 다 큰 A가 하는 일인데. A가 하는 일에 왜 그리 관심이었냐 하는 것은, 그가 최고의 연예인 중 하나였다는 것 때문이라고 차치해보겠다. 백 번 양보해서. 그러나 A가 올리는 글과 사진에 대해 그렇게도 물고 뜯은 것은, 어찌 해도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위다. 그가 속옷을 입든 말든 연기를 하고 싶은 열망을 가져 공부를 하든 말든 대체 누구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냐는 것이다. 직업윤리 운운하는 것도 좋으며 책임감도 좋으나 누구들의 기대를 A가 다 받아내야 할 의무는 없다. 그 누구도 A에게 그런 의무를 지울 수 없다.


지역 출장서 돌아오는 늦은 밤, 숨돌리며 스마트폰을 켠 후에야 나는 A의 소식을 보았다. 처음엔 그저 아닐거야 하는 생각이 스쳤으나 사실이었다. 남의 말, 여러 말들, 누군가가 무심코 한 말들이 다른 이에게는 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보고 듣고 많이 읽고 자랐으면서도, 동시대 상징이라 부르며 그토록 예뻐하고 멋져했던 A조차 지키지 못했다. 


A를 지켜야 하는 것은 그 누구의 숙명도 아니다. 누구의 책임도 아니지만, 적어도 A의 불안정함을 눈치챈 누구들이라면, A가 하는 행동을 하나 하나 재단하지는 말았어야 했다. 누구에게도 그럴 권리는 없다. 앞으로도 생겨날 수많은 A들과 자행하고도 모른 체할 누구들의 밤은, 또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지나갈 것이기에, 그것이 두렵다. 나아가, A들에게, 눈 감고 귀 닫고 '아이고 인간들아' 하고 조금은 오만한 마음으로 살아주길. 그래야 본인이 살 수 있다는 것을. 너무 착하지 말라고. 마음이 춤을 춰 힘들다면 그대로 춤을 추라고. 그래도 된다고. 그냥 누구든 지나가는 A가 있다면 그렇게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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