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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로 쓰는 앎Arm Nov 24. 2019

나는 어디에도 없다

글 쓰는 직업은 나름 괜찮다고 생각했다. 유념해야 할 것을 스스로 기록할 수 있고 때론 아픈 걸 글로 덜어낼 수 있으니. 그림의 재능을 가진 이는 그림으로, 음악의 재능을 가진 이는 음악으로 풀어내듯, 쓰고 싶은 게 마음에 있는 사람은 쓴다. 그런 쓰는 사람이라서 힘들지만 좋다고 생각했더랬다. 작가도 영화 감독도 다 바닥에 발 붙이는 직업 같지 않아 보였다. 얄팍한 정의감까지 생겼더랬다. 그러니 기자를 꿈꿨는데 웬걸. 나는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점점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들기 시작하는 중이다.


너무 많이 힘들고 지친다. 지겹다. 오해들이. 기자라는 이름을 달았다는 것만으로 손가락질 받는 것들이. 진심을 오해받는 순간들이. 그냥 그러려니 하고 쿨한 체 해야 하는 나의 모든 상황들이. 사실은 아프다. 집에 돌아가고 싶고 나 역시 다 그만두고 이제 그냥 푹 쉬고만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으니 자꾸 뭘 한다. 뭘 해서 하루를 살 이유를 만들고 일을 하고 일을 만들고 사람을 만들고 인연을 만든다. 뭐라도 그렇게 얽매여야 내가 일을 일로서 해내고 살아갈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어서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이게 옳을까 하는 것. 한 켠에 또 드는 생각은 이게 옳지 않으면 어쩔 건데 하는 생각. 어른 다 그런 거 아니냐는 생각 따위다.


무례한 사람들에게는 예의를 차리는 게 바보가 된다. 목소리 큰 사람에게는 공공장소니 목소리를 낮춰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바보가 된다. 세상이 왜 이래 하고 어리둥절할 나이는 아니고 그런 사람도 아니고. 그냥 그러려니 하고는 그런 사람과 어울리고 싶지 않아 한다. 하지만 일이란 어떤가. 사람의 생각의 다양성은 또 어떠한가. 나는 무례하게 쏘아대는 말들로부터 그냥 도망가고만 싶다. 그럴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어 마주하고 앉아 키보드를 도닥인다. 그럴 수 없다. 그럴 수 없다의 이유는 첫째, 돈이 없다. 둘째, 배운 게 도둑질이라 이 일이 좋다. 좋다. 좋으면 된 거다.


그렇게 억지로 내 이유를 쥐어짜낸 후 마른 걸레 짜듯 일상을 영위한다. 내가 영위하는 일상엔 과연 내가 있나? 나는 어디에 있나? 어쩌면 나는 어디에도 없다. 나는 내 일상에 내가 어디에나 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나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 나는 마음 둘 곳 없이 어쩌면 조금은 마음이 공중에 부유하는 채로-그것은 붕 뜬 상태가 아니다. 그저 부유하는 것일뿐-매일을 보내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뱉는 말엔 진실이 없고 내 진실은 오롯이 이 곳, 내 안에만 부유할 뿐이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해 계속 해서 그렇지 않거나 비슷하다고 내가 나를 위로하는 일을 해오고만 있는데, 이것이 언제까지 갈 것인지, 어쩌면 평생 이러는 것은 아닌지, 나는 이제야 마주하는 것이다.


정신을 차리라는 내 안의 목소리는 내게 공허하게 들리며, 나는 어쩐지 나사가 하나 빠진 이처럼, 그저 출장을 가고, 일을 하고, 키보드를 도닥이면서, 불안에 떨다가, 위안을 찾다가 하면서, 그저 어쩐지 시간 개념을 잊은 채 그렇게 매일을 어딘가로 흘려 보내고 있다. 그 흘려 보낸 매일은 어쩌면 기적 같은 선물을 안기겠지만 그마저도 과거의 내가 혼신의 힘으로 만든 결과일진대, 현실의 나는 그조차 받을 능력이 안 돼 그저 오늘을 또 미래의 나에게 흘려 보내고 있다. 자꾸만 그에게 선택을 미룬다. 어떤 선택을 해야할 것만 같다면서도, 그게 뭔지 모르겠다는 그 허울 좋은 핑계 하나에 기대서 말이다.


이 일이 가장 싫어질 때를 꼽아볼까. 우리는 애매한 사람이다. 공인도 아니고 일반인도 아니다. 스스로 일반인이라고 생각하는데, 자꾸만 공인 코스프레를 요구받는다. 회사의 이름을 달고 가는 현장서는 당연히 회사 이름이 된다. 그럼 도마에 쉽게 오른다. 눈으로 평가하고 귀로 평가하고 회사의 이름으로 재단지어진 그 곳에 나는 없다. 기자를 꿈꿨던 건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어서였는데 그 열망, 그 순수성마저 의심받는다면, 이 일을 왜 해야 하는 건데.


둘째, 수많은 가짜 속 진짜를 가려내려고 매순간 고군분투한다. 모든 말을 다 믿을 수 없다. 아무의 말이나 받아 적을 수 없다. 받아 적은 후에도 그걸로 끝이 아닌 다른 해결책까지 찾아내야 한다. 애써 찾아낸 것들은 '네가 뭔데' '가르치네' 따위의 것으로 치부된다. 안다. 그래. 얼마나 재수없겠냐고. 근데 그럼 어떡하냐고. 존버해서 내가 회사를 바꿔보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들에 웃는데 그 또한 얼마나 무례한가. 당신에게 당신이 존버해 당신 회사 문화 그지 같으니 바꿔봐요 하면 기분 좋겠냐고. 제대로 알면서 하는 소리도 아닌데 왜 그러는 거냐고.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보람을 찾아 인류애를 얻고 나면 다시 또 빌런이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한다. 하루에도 만나는 새 사람이 너무 많다. 그러니 감동을 유지하면서 또 다른 데서 뒤통수 맞고 다른 데서 인터뷰해주기 싫은데 왜 말 시키는 사람? 취급 당하고 뭐 이래 저래 하다보면 그냥 가끔은 아씨, 확 때려쳐?! 하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다. 그 대상이 절박한 이가 아닐 때가 많으니 저런 생각도 드는 거다. 아프고 필요한, 목소리 낼 데 없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그리 치이면 그래도 내가 나를 위로는 하겠지. 쉬울 줄 알았냐고. 세상 일 다 어렵다고. 근데 이건 뭐. 잘 모르겠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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