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누르는 것은 무엇인가

by 팔로 쓰는 앎Arm

모처럼 휴가를 가진 여자는 생각했다. 어디든 훌쩍 다녀오자고. 매일같이 불면에 시달리던 여자는 매진 행렬의 버스 표 중 용케 취소표를 찾아 내었다. 적당한 시간대, 하나의 자리. 바람같이 표를 구하고 바다 근처 호텔을 잡았다. 남은 방이 하나뿐이라 부랴부랴 예약을 끝낸 여자. 딱 하나씩 남은 여자의 자리. 차와 방을 구해둔 여자는 뜬 눈으로 밤을 보내다 아침이 밝자 그제야 생기를 찾았다. '밤은 괴로워.' 여자는 배낭 하나를 둘러 메고는 차 시간보다 훨씬 일찍 집을 나섰다. 햇살이 그리워. 밤은 두려워. 햇살을 맞으면서 출근하는 사람들과 반대로 걷던 여자는 출근길 지하철에서 몸이 이리 저리 쏠리다가 뱉어내듯 내려졌다. 길 위에서 여자는 약간의 설렘, 미소를 머금었다. 아침이 좋아. 기운이 충돌하는 아침들이 좋아.


많은 사람들 속에서 여자는 안정감을 찾고자 약을 하나 꺼내 먹었다. 약을 먹고 물을 꿀꺽 마시고는 자리에 앉아 버스가 들어오기만을 바란다. 버스에 몸을 실은 여자는, 대뜸 자리를 바꿔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창가예요." 솔깃한 제안에 여자는 미소를 머금고 그냥 자리를 바꿨다. 옆엔 누가 앉을까. 흰 모자를 쓰고 흰 패딩을 입은 어린 사내 하나가 몸을 실었다. 사내는 여자가 먹는 젤리, 여자가 듣는 음악, 여자가 찍는 사진 하나 하나를 관찰했다. 이따금 눈을 바라보며 말을 걸듯 입을 달싹거렸으나 여자의 이어폰이 굳건한 벽을 만들어 주었다. 마침내 건넨 한 마디에 여자는 짧게 "감사합니다" 하고는 이어폰을 다시 꽂았다. 눈을 감았다. 여자는 그렇게 적당한 설렘, 적당한 미소를 품고는 버스에서 뱉어내졌다. 서울의 외로운 밤을 건너 바다 앞에 내려진 여자는, 수시간의 버스 안에서의 고단이 생각보다 여자를 짓누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바다를 눈 앞에 두고 지칠 수는 없지. 여자는 약을 하나 꺼내 먹고는 몸을 일으켰다.


버스가 예상 시간보다 한 시간 넘게 늦어 도착한 덕분에, 여자는 딱 알맞게 체크인 시간에 맞췄다. 물을 수없이 마시던 여자는, 문득, 소변이 마렵다는 생각을 했다. "넌 왜 화장실을 안 가?" "넌 물 마시는 거에 비해 화장실을 너무 안 간다." 서울에서는 화장실을 절대 안 가는 여자였다. 약속장소, 미팅자리, 일하는 곳 등에서 여자는 화장실을 좀처럼 잘 가지 않았다. 물은 2L씩 마시면서 화장실은 양치 말고는 갈 일이 없어 보이니, 주변인들은 여자에게 그런 질문을 심심찮게 던졌더랬다. "넌 화장실을 참 안 간다." 여자 자신도 알고 있었다. 소변이 잘 마렵지 않았다. 그냥 물을 많이 필요로 하는 몸인가 보다 하고 여자는 생각하곤 했더랬다. 그랬던 여자가, 문득 긴장이 풀렸는지, 드디어 풀렸는지, 소변이 마렵다는 생각을, 간절하게 하는 것이었다.


굉장히 여유로운 척 엘리베이터를 타고 예약해둔 방 앞까지 걸어간 여자는, 하필이면 방이 또 맨 끝이라, 소변이 마렵다는 생각을 이제 긴급하게 하면서, 카드키를 가져다 대고는 문을 열었다. 적당한 온기와 냉기가 맴도는 방 안은, 햇살과 바다가 가득해서 여자를 황홀하게도, 긴장에 설레게도, 적당히 억눌리게도 만들었다. 여자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알 수 없는 기분이 여자를 감쌌다. 훗날 알게 될 감정이라고, 지금은 확신할 수 없다고 여자는 생각했다.


여자는 배낭, 패딩을 안착시키고는 스파부터 시작했다. 씻기부터 할래. 여자는 물을 그리 좋아했다. 물 속에 있는 것, 물 안에서 비현실적인 거품들 속에 몸을 내맡기고는, 제 키보다 높아진 거품들에 몸을 뉘이고, 그저 눈을 감고는 끝없이 침잠, 침잠, 침잠하리라. 여자는 여러 번의 스파를 마치고는 나갈 채비를 했다. 서울선 입맛이 없어 힘들어 하던 여자는, 바다 앞에서는 입맛이 살아났다. 뭐든 맛있는 동네. 뭐든 맛있어서 어디든 들어가서 그저 국밥 한 그릇 하면 영양이 다 채워지는 기분이 드는 동네. 여자는 바다의 기운을 받으며 바다를 들이 마시고는 쌍화차 한 잔을 마셨다. 여자는 자기가 아프려는 기운이 드는 걸 이제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아픈 건 싫어. 바다 앞에서 아플 순 없지.


여자는 약이 주는 두통을 애써 무시하며 호텔로 돌아와서는 바다 내음을 다시 들이 마셨다. 바다, 바다. 바다. 아무 것도 없는 듯한 적막, 잔잔한 물결이 주는 소리, 이따금씩 떠있는 배들이, 여자를 잡았다. 여자의 마음이 동실 동실 뜨면, 바다, 하늘을 비추는 그 바다는, 여자의 마음을 개이게 했다. 처음 보는 바다고 예쁘고, 두 번 보는 바다도 예쁘고, 바다는 그저 끊임없이 푸르고 예뻤다. 여자는 바다 앞에서 한참을 생각하다가, 괴로운 밤이 되자 두려워졌다. 밤은 여자를 괴롭게 했다. 비현실적은 거품들도, 무엇도, 여자에게 위로가 되지 않는 밤에, 여자는 그저 소음 속에서 안정을 찾았다. 음악을 틀고, 뭐든 하고, 뭐든 해야 했다. 아무 것도 안 하겠다고 다짐하고 온 이 바다 앞에서, 여자는 다시 괴로워져서는, 나를 따라 다니는 건 뭐지 하고 수시간을 뒹굴었다. 그렇게 눈물로 지새우며 찾은 답은 결국 중압감. 누구에게도 진실할 수 없으리라는 중압감. 진실을 고백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상처가 있다는 걸 말하는 건 두렵지 않았다. 두려운 건 상대의 상처였다. 상처를 고백할 좋은 사람에게, 상처를 고백하면, 상대는 상처를 받았다. 그만큼 큰 상처여서, 그런 걸 공유하면서 상대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여자는 그냥 바다를 바라 보았다.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계단을 발견하고는 마음이 편해졌다. 언제든 선택지는 있다는 것이 여자를 슬프게도 안정감을 찾게도 만들었다. 여자는 검은 바다에게서도 위로를 받으면서, 달을 비추는 바다를 내려다 보며, 이 모든 게 꿈 같다고 생각했다. 여자의 눈빛은 자꾸만 공허했다. 여자는 강제로 땅에 발을 디디려 애를 쓰며 매일을 전전긍긍했다. 그러니 여자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틀을, 사흘을. 여자는 그 바다 앞에서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는 두통에 시달리더니, 마침내 해가 떠오르고 새벽 바다의 푸른 빛이 비추자, 다시 비현실적인 거품들 속에 들어가서 안정을 찾았다. 그렇게 수시간을 거품 속에 몸을 내맡기고, 물을 이리 저리 조절도 해가며 여자는 그제서야 약간의 평온을 느꼈다. 지독한 내면의 '부닥거림'에 진절머리를 치면서, 도대체 나란 인간은 왜 이런가, 왜 이렇게 피곤한 인간인가 하고는, 그건 어쩔 수 없는 라는 걸 일찍이 알고 있지 않았느냐고, 그렇게 속닥거리는 복잡한 속에게서 애써 귀를 막으려 거품 속으로 침잠하고 또 침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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