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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로 쓰는 앎Arm Feb 16. 2020

본인이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인간의 오류

대개 이 일을 하면서 일은 사랑하지만 사람이 어려워 떠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자주 찾아오는 순간은 아니다. 좋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그들에게 집중하며 살면 어렵지 않아서다. 하지만 어떤 유형의 인간은 자신의 불편, 자신의 주관, 자신의 오류를 상대의 선을 넘어가면서까지 전달하지 않으면 못 참곤 한다. 갈등은 이런 유형의 인간을 동등하지 않은 관계나 기타 더 이상 인연을 이어나가고 싶지 않은 상황에서 만날 때 발생한다. 그저 흘러가는 하나의 불편한 사람 등으로 스쳐가면 그뿐일 것을 이런 유형의 인간은 상대에게 자신의 오류를 굳이 전달하고 상대를 상처준 후 자신의 마음이 편해지는 방법을 택한다. 그 유형의 인간과 깊은 교류를 하고 싶지 않았던 상대는 굳이 맞대응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 때 답하는 방법은 "그럴 수 있죠", "그러려니" 하며 고개를 끄덕이며 그저 웃어주는 것이다.


쉽게 웃어주는 건, 노래에도 있듯 그저 나를 위해서다. 내가 웃어주는 것, 박수쳐주는 것 등은 결국 미안하지만 나를 위한 것이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연배의 이가 선을 넘어올 때면 "아 인간이란 참 다양하구나", "인간이란 어리숙하거나"로 합리화를 하지만, 사실 알고 있다. 썩은 질투의 냄새가 나는 그 유형의 인간의 행동에 대해, 내가 굳이 반응하며 일을 키우거나 그 유형의 인간 마음 안에 있는 문제를 내 영역으로 끌고 들어올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 모른 체할 뿐, 그 유형의 인간들이 어떠한 발상의 흐름 없이 그저 질투심에 발끈해 어떤 상황이든 왜곡해 떠들어대는 행위에 대해, 나는 모르는 게 아니다. 모른 체해주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건, 나를 위해서다. 철저하게.


앞선 문단에서 언급한 '대개 이 일을 하면서 일을 사랑하지만 사람이 어려워 떠나고 싶어질 때'는 유효기간이 길지 않다. 때론 그 자리에서 잊어버릴 때도 있고(대부분이다) 이후 저녁 자리가 있으면 거기에서 두어 마디로 "쯧, 그래" 하고 털어낼 때도 있다. 내가 이런 유형의 인간에 대해 굳이 일기에 적는 것은, 세상엔 다양한 사람이 있고 저들 또한 어쨌든 인간 군상 중 하나이므로 앞으로도 계속해서 마음을 굳게 먹고 나아가면 된다는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종종 나를 괴롭혀온 그 유형의 인간들은 대개 상황을 왜곡하고 상대에게 질투하며 그 질투를 상대에게 전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상대의 입장에선 그저 그러려니 하면 된다. 하지만 내가 이 일을 하며 일적으로 만난 이들 중 그런 이들에게 가끔 환멸을 느끼는 건, 아직도 내게 '이 일'이란 것에 대한 환상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게 문제다.


어쨌든 기자 문화가 좋은 건, 대개 기자들은 영리해서 상황을 읽고 적절하게 해석하는 훈련이 돼 있기 때문이다. 도제식 문화로 자신의 시선을 계속해서 의심하고 질문하고 정말 그런지 역지사지로 따져보는 과정에서 사람은 결국 분별력이 생긴다. 기자들이 대개 조용하거나 나서지 않으려 하는 건 분별력의 산물이다. 같은 업계지만 기자, PD들이 무섭다거나 속을 알 수 없다고 말하는 이들과는 좀 다른, 어쩌면 오만, 어쩌면 두려움, 어쩌면 분별력, 자제심의 산물로 상대를 '그러려니' 이해하고 나서지 않아주는 것 뿐이다. 내가 어려 보이고, 쉽게 웃어주고, 분위기를 잘 맞춰준다고 해서, 아주머니의 질투심을 자극했다면, 미안하지만, 당신의 타격 시도는 내게 단 하나도 타격을 입히지 못한다. 가짜 '페미니스트'의 이름을 들고 별 것도 아닌 일들에 질투의 소산물인 잣대를 자꾸 들이대 헛소리를 떠들어 댄다면, 좀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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