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일나도 티를 안 내네요. 예상했어요? 하긴 ㅇㅇ씨 스타일인가"
언젠가 현장에서 만난 이가 했던 말이 귀에 콕 박혀 떠나질 않았다. 글쎄 나도 모르겠다. 나는 웬만한 일에 별로 놀라지 않는다. '큰일'이라고 그는 말했지만 내 기준엔 큰일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돌발상황이 생기면 해결한다. 그럼 된다는 주의다.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고 살아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으니 그런 생각도 하는 거다. 아, 생활인이시여 오만하려는 목적은 없었습니다. 그저 표현일 뿐입니다. 이렇게 소심한 구석도 있지만 일할 때는 저돌적이다. 밀어붙여야 할 때를 정확하게 아는데 그건 직감으로 안다. 또, 뭐든 뭉개고 앉아 있는 것보다는 단번에 해결하는 걸 좋아한다. 때론 그저 기다려야 하는 일도 있지만 그건 이~만큼 쌓아놓고 기다려야 하는 거다. 그러니, 기다리기 전에는 뭐든 추진력 가지고 해둬야 하는 거지. 기운이 왔을 때는 빨리 해야 한다. 그 찰나를 놓치면 애매해질 때가 많다. 그러니 늘 신경이 곤두세워져 있고 종종 아팠던 거다.
나는 이제 쓰고 싶은 왕관을 쓰기로 했다. 왕관이라는 건 그저 비유일뿐 뭐 다른 의미는 없다. 무게를 견디는 게 죽도록 힘드니까, 쓰고 싶은 걸 골라 쓰고 속칭 '찌부'가 되든 뭐든 견뎌보기로 했다. 언젠가 어린 시절 지드래곤이 어디 나와서 '이 산을 이만큼 올라와서 다 왔다고 생각했는데 산을 잘못 올라온 거야! 그래서 빨리 다른 산을 탄 거지' 하는 뉘앙스의 얘기(정확한 문장이 기억 안 나서 뉘앙스라고 표현)를 한 적이 있다. 어린 내 귀에 그게 참 꽂혔는지 '왜?' 하는 의문이었겠지. '그 산에 가서 만족하고 살 수도 있을 텐데' 혹은 '그 산 내 귀엔 좋게 들리던데' 하는 이유에서였을 테다. 나는 요즘 딱 그런 상태다. 의문이 들던 그 상태 말고 '이 산 아니네. 얼른 내려가자. 내려가 내려가 얘들아! 빨리 다른 산 타자' 하는 상태 말이다.
뭐든 해결하면 된다. 뭐 좋은 얘기는 아니지만 굳이 꺼내두면-집안에 사연 하나 없는 이가 누가 있겠어. 뭐 있겠지만 그래도!-나는 어린 시절부터 워낙 격동적인 가정에서 자라서, 웬만한 일에는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이런 말을 하면 인생이 '카운터펀치' 또 날리러 올까봐 무서우니 보호막을 씌워둔다. 암튼, 그런 과정에서 내 할 일을 또 잘해내며 그것만이 내 탈출구라 여긴 시절을 수십년(?) 보냈으니 당연히 나는 그런 근육이 자라 있다. 그러니 일반적으로는 놀랄 만한 상황일지라도 그냥 앉아서 해결하는 게 마음 편하다. 나는 툴툴대는 사람을 위로하는 스타일보다는 해결책을 찾는 유형의 인간이다. 내 자신에게도 그렇다. 그러니 누군가에겐 엄격하고 빈틈없어 보일 때도 있고 내 스스로도 '나한테 이렇게까지 해' 할 때도 가끔 최근에야 있었다. 하지만 뭐, 그게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감사한 자세라고 생각한다. 엇나가지 않고 잘 버텼고 잘 커왔고 잘 해왔다. 앞으로도 잘할 거란 걸 안다. 장하다.
일기를 쓰는 건 내가 삶을 운영해 나가는 과정 중 하나다. 일기든 뭐든 글을 쓴다는 것 혹은 안으로라도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두고 기억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시간은 참 빠르고 순간의 결정들이 우리를 만든다. 이 과정에서 항상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내가 내 자신에게 당당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순간이 고통스럽더라도 결국은 미래의 내가 과거의 나를 장하게 여길 선택을 한다. 그게 내가 사는 방식이고 일기는 그 과정의 나를 돕고 위로하는 수단이다. 유일하게 내가 속내를 터놓는 대상, 조금이나마 속을 보이는 대상이 바로 일기다. 그 일기를 쓰면서 나는 오늘을 점검하고 내일을 맞을 수 있다. 과거를 치유할 수도 있다. 그건 아주 축복받은 일이다. 글밥을 먹는다는 것, 그를 통해 나를 치유한다는 것, 미래 청사진을 그린다는 것은 감사할 일이다. 늘 감사하고 또 감사하며 조심스레 살아내는 일이다. 뭐든 예상할 필요는 없다. 그저 주어진 오늘을 살면서 내가 그려둔 그림에 내가 가까워지고 있는지를 생각하면서 조심히 오늘을 고분고분 살아내면 그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