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이든 경력직이든 첫 조직에 들어가면 이른바 '기싸움'을 겪는다. 기존에 있던 선배들이 대체 뭐가 못나서 그런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몇 개의 직장을 거치며 느꼈다. 그간 '이유가 있겠지' 했던 갈굼들은 지나고 보니 그저 기죽이기에 불과했다. 누구나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강해보이는 사람, 기 꺾고 싶게 만드는 당당한 사람이 주로 그 대상이 되고 남자든 여자든 똑똑해 보이는 놈이 그 대상이 된다. 아예 전투 의지 자체를 불타오르게 하지 않는 이는 그냥 방관의 대상이 된다. 그러니 뭐든 장단점이 있다. 튀면서 견제받을 것이냐 조용히 회사 다닐 것이냐. 후자가 훨씬 낫다. 얇고 길게 가는 조직 생활을 위해선 말이다. 그러니 튀면서 견제받는 사람에 속한다면 후자를 연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 칼을 꺼내야 할 때 꺼낼 수 있게 말이다.
다만 문제는 그저 드러나는 것에서 이미 판단되는 것들이 있다. 대개 우리는 회사에 가서 일 잘하면 모두가 좋아할 거라 생각한다. 현실은 다르다. 견제의 대상이 되고 입길에 오르며 그저 열심히 했을 뿐인데 '뭔데 주인의식 가지냐'는 뒷담화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다 잘났는데 왜 혼자 잘난 척하느냐'며 열심인 사원의 태도를 후려치는 일도 즐비하다. 이건 뭐 나쁜 일을 말하자는 게 아니라 세상사 워낙 복잡다단하고 인간의 유형도 여러 가지라서 너무 순진하게 '열심히 하면 해피엔딩이 온다'고 생각하면 위험하다는 것이다. 나는 늘 뭐든 열심히 하는 업글인간으로서 10을 주면 배를 해내는 인간에 속했다. 덕분에 성장도 승진도 빨랐다. 하지만 인간은 다 가질 순 없다. 속도가 빠르면 적도 늘어나고 시기, 질투도 증가한다. 외로워지는데 손에 잡은 건 어설픈 커리어뿐이니 현타도 온다.
그러니 농익는 시간이 필요하다. 버티는 것도 능력이라지만 요즘같은 세상서 인격 모독을 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는 없다고 나는 말하곤 한다. 일이야 어딜 가서든 하기 마련이고 열심인간이라면 자리도 많기 마련이다. 쓸데없이 기를 죽이려는 인간을 만나면 맞춰주되 내가 챙길 커리어도 챙겨야 한다. 치고 올라오는 후배를 누르려는 선배는 아주 많다. 슬프게도 같이 성장하고 싶어하는 선배보다는 뭐 하나라도 뺏어 가려는 선배가 더 많다. 그들은 그걸 뺏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본인들도 선배들에게 빼앗겨왔기 때문에 이제 당연히 자신들의 차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요즘같이 공정성이 중시되는 시대에서 위험한 발상이지만 이 또한 세대 차이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선택은 본인이 하는 것이다. 그런 선배들처럼 될 것인가 혹은 아닌 소수의 선배들처럼 될 것인가. 나는 후자를 택했다.
후자를 택하면 또다른 압박이 온다. 후배를 누르라는둥 별 시덥지 않은 소리가 들린다. 이것은 과거의 문화다. 그게 옳지 않다는 걸 마음으로 알면 그냥 넘겨야 한다. 모든 순간들은 쉽지 않다. 마음도 복잡하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무능한가 생각하지 않고 그냥 측은지심 가지고 '여길 떠야지' 하면서 나날을 보낸다. 내 일이나 열심히 하면서 살면 된다. 인간이 다 가질 순 없어서, 좋아하는 일을 하면 또 다른 의심의 눈길을 받는다. 열심인간인 것의 배경에 뭐 다른 게 있을까 하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집에 뭔 일이 있을 거야, 워커홀릭일 거야, 문제가 있어서 일중독일 거야 등이다. 그냥 인간은 다양하다는 걸 인정하면 되는데 꼭 저런 말들이 들린다. 그들이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다. 그저 자신들이 그렇게 성과를 내고 싶지도 않고 낼 수 없으니 모두가 하향평준화하길 원해 지어내는 말들이다. 알면서도 별 협잡질을 흘러 넘기는 건 웬만한 내공 아니고서야 어렵다.
사회초년생 시절부터 들었던 온갖 성적인 농담과 협잡질 등의 주체는 남자뿐만이 아니었다. 여자도 많았다. 그래서 나는 남자와 여자를 갈라 어디가 더 정의로운 것처럼 말하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 다만 경향성의 차이에서 상대적으로 나이든 남자와 여자가 그런 발언을 하는 일이 더 많았다. 그건 그들이 그만한 위치에서 그렇게 말해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나고 보니 당시엔 '아닐 거야' 했던 소름돋는 일들이 겪어선 안 될 일이었다는 걸 알았고, 나는 그런 일이 이 세상에 반복되는 걸 바라지 않는다. 세상은 하루 하루 나아지고 있지만 또 암담한 일도 여전해서, 가끔은 머리가 아득해진다. 하지만 분명한 건 발전하고 있다는 거다. 불과 2~3년 차이 나는 후배에게서 듣는 말도 선진적이다. 나는 커리어를 위해 참지 말아야 했던 것들을 많이 참아왔다. 내게 가해지는 폭력들을 많이도 참았다. 참는 편이 나았으니까. 근데 나는 더 이상 그걸 원하지 않는다. 살 만해지니 그렇다는 게 아니다. 그런 걸 참는 게 당연한 세상이 더 이상 지속되어선 안 된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