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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색의 내 방

by 팔로 쓰는 앎Arm

이사엔 이골이 날 정도로 이사를 많이 다녔는데 그러다보니 살아남아주는 물건들은 고마울 지경이다. 왜 망가졌나 싶은 물건을 처음 만난 때를 떠올려보니 벌써 근 10년 전이다. 일기에 적으려고 숫자를 돌아봤는데 소름돋았다. 정말 10년이네. 이번 주인공은 가방이다. 항공사에서 어떻게 한 건지, 올 때 터져왔다. 그럼에도 아주 튼튼한 아이라 다른 곳이 지탱해주던 아이다. 테이프로 동여매고 있는데 가방이 말하는 것 같았다. 이제 보내줘. 지퍼가 다 터져버린 아이를 데리고 또 망가뜨린 항공사의 손에 넘기려던 게 무리한 일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쇼핑을 나섰다. 내 가방을 고르고 있자니 많은 사람들(정말 많은 사람들...)이 와서 가방도 골라달라고 하고 열어보면 어떨지 의견도 묻는다. "너 꼭 나같다"며 다가온 할머니는 내가 아주 꼼꼼하게 물건을 고른다며 가방을 골라달라고 했다. 그러더니 요정할머니처럼 내게 꼭 필요했던 줄자를 꺼내 빌려주고 가방회사들은 거짓말을 하니(ㅋㅋ) 사이즈를 직접 확인하라고 했다. 여러분~(여러분... 여러분~ 너무 보고싶었어요~~말고... 미안하다 요즘 말장난에 꽂힌 모양이다.)의 다양한 여행 이야기, 여행을 태어나 한 번도 못해본 이야기, 한국에 대한 이야기, 일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가방을 고르면서. 이런 건 내 일기에나 쓰지 누구한테 말도 못한다. 그냥 난 있으면 (레알 그냥 exist) 사람들이 다가와서 이야기를 한다. 재밌는 이야기들을 해준다. 진짜 사랑이 넘치는 도시다.


아무튼간에 익명의 누군가들의 이야기들을 잔뜩 들으며 신중하게 가방을 골랐다. 10년은 같이 가야 하지 않니? 하면서 가방에게 잘 부탁한다고 인사도 했다. 다른 나의 갑옷들과 다르게 고장난 내 가방을 보내줄 생각을 하니 눈물이 날 지경이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안 난다. TTTTTTT) 그래서 그냥 한 켠에 아직 세워뒀다. 난 매일같이 일과를 소화하고 집 와서 청소하고 버리고 짐싸는 걸 그냥 매일 하는데 (옷장정리 중독인 사람 나야 나) 그건 미래의 나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아서다. 이게 편하다. 여느 스튜디오처럼 하얗고 (거의) 텅 빈 노란 조명의 방을 보고 있자니 잘하고 있군 싶다가도 예전에 이사하다 아파 쓰러진 기억이 오랜만에 났다. 그래서 라면을 꺼내 먹었다. 밥을 안 먹으면 나중에 이상하게 오더라. 먹어야지.


이사할 때마다 옷걸이들은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다린 옷을 각잡아 걸어두고 매일 퀘스트처럼 입는 걸 좋아하기에 옷걸이가 정말 많다. 빨래건조대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튼, 옷걸이들은 늘 기부하거나 했는데, 여기서 다행인 건 두고가도 쓸 사람이 있다는 것. 장점이다. 옷걸이를 정리해 옷장 안에 차분히 걸어두니 내가 보기에 담백하고 예뻤다. 흰색, 검은색, 회색, 나무색은 늘 예쁘다. 하늘색도 곁들이면 좋다. 그냥 내 취향이다. 뭐 아무튼 예쁜 내 흰 옷장과 걸린 옷걸이들을 보다가 보내준 짐들을 생각한다. 어디선가 좋은 주인을 만나 잘 쓰이고 있다면 좋겠다. 고마운 나의 물건들. 그리고 내일의 약속을 생각한다. 부디 남의 연애 이야기를 덜 듣게 되길! 난 아무래도 사람보다는 로보트인 편이 맞는 듯하다. 싫으면 안 만나면 되지 않을까? 아무래도 나는 '월든'처럼 살기 위해 진지하게 고민을 해야 할 것 같다. 시끄러운 소리에 섞이는 걸 너무나 싫어하므로. 뭔가 설정값이 그런 것 같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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