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내게 바라는 게 그런 모습이라면 그래야 한다. 그게 내가 나를 축내지 않는 방법이니까. 너무 열심히 하지 말라는 지인의 말이 귀에 댕댕 울려댄다. 황망했던 마음이 어느새 이해로 바뀐다. 나보다 더 뛰어나고 능력 있는 분의 현장감 가득한 말씀이셨으니 그 말에 따르기로 했다. 너무 열심히 하면 버림받아. 그의 그 말은 내 마음 안에서 일어날 일을 미리 걱정해준 것이었다. 내가 나에게 상처 주는 일을 없애기 위한 최선의 예방책을 어쩌면 아주 일찍 알려준 거였을 거다.
멍청하고 아둔해진 채 숨 막히는 날들을 보내니 허벅지를 때리고 싶을 정도로 가슴이 답답했다. 수업시간에 몸을 비트는 아이의 마음 같은 게 아니라 집단을 억누르는 멍청함의 공기. 그게 다수인 것처럼 가장되었을 때 일어난 황당한 상황. 얼마 전이라면 그거에 대해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이제 그냥 말한다 해도 큰일처럼 입력하지 않기로 했다. 내 머릿속에. 그래야 살아갈 수 있다.
적당히 거리두기. 정확한 거리를 선호했던 과거의 나. 그건 깔끔한 최선책이었다. 그 선을 넘지 않을 때만이 가질 수 있게 되는 어떤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행위는 지극한 안정감을 준다. 그 거리가 확보되지 않을 때 느끼는 당혹감, 두려움, 거부감. 그건 사람이라면 당연히 갖게 되는 일이다. 그런 감정에 귀 기울이지 말고 다시 당분간 멍청해져야겠다. 그냥 느끼지 말자. 나는 감정 없는 사람이다.
회식 자리에서 공공연하게 발생하는 약자를 향한 취한 자의 행패. 그리고 묵인하는 자와 키득대는 자. 취해서 자기 몸을 가누지도 못한 채 타인에게 무차별 공격을 행사할 거라면 그 회식 자리는 친목 도모가 아니라 공격의 장이다. 그러니 그런 자에게는 시선을 거둬 버리자. 이의 제기를 해도 묵인돼 돌아올 테고 이미 권력층이 뚜렷한 이상 뭐 별 수 없다. 그런 자의 입에서 정의라는 단어가 나오고 기사라는 말이 나오다니 소름이 돋는다.
소름이 돋아도 어쩔 수 없는 것은 그게 대다수이고 현실이며 어쩔 수 없을 거라는 생각 탓이다. 결국 어딜 가도 그런 자는 그런 자일 것이며 모르는 어른들의 세계에는 더 음지같은 구석이 있다는 걸 들어버린 후의 나는 당연히 같은 시선으로 그 자를 볼 수 없다. 그러나 거리를 둔다. 나와는 상관없는 남의 일일 뿐이다. 다시 한 번 나에게 되새긴다. 애매한 그 직업의 이름으로 사람에 대해 다른 걸 기대하지 말자. 그저 그런 자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