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가능해?
내일, 직장동료 K와 파자마 파티를 하기로 하였다. K와 파자마 파티를 한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7년 전 봄, K를 처음 알게 되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친구를 만날 수 없다는 말을 익히 들어왔기에 K와도 스쳐가는 직장동료쯤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새 K와는 친한 친구가 되었고, 친한 지인에게도 말 못 하는 서로의 치부도 털어놓을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그 날의 봄, 우리는 같은 학교 동학년 교사로 만났다. 직장에서 또래를 만난 것은 내가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항상 나보다 훨씬 연배가 높으신 50대 이상의 동료를 만나왔고, 아무리 어려도 나보다 5~6살은 위인 선배교사 정도였다. 우리는 서로가 동갑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처음부터 서로에게 든든함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러니하게도 K라는 소중한 존재를 만난 그 해는 내 직장생활 중의 혹한기였다. 동학년이었던 부장교사 두 명은 그 학교에서 악랄하기로 유명한 꼰대였다. 야근 수당도 못 받게 하며 매일 야근을 시켰다. 야근을 하는 걸로는 양에 차지 않았는지 8:30까지였던 출근 시간조차 30분 일찍 와서 자기들이 먹을 과일을 깎아두라고 했다. 8시 전까지 오지 않은 날엔 하루 종일 노려보며 비아냥댔다. 늦은 밤까지 야근할 때는 당연히 저녁도 못 먹고 일을 해야 했기에 하루에 먹는 밥이라고는 학생들과 급식실에서 먹는 점심 한 끼가 전부인 날이 잦았다. 당시에 자취생이어서 퇴근 후엔 요리할 힘도 없었고, 녹초가 된 채 빈 속으로 다음 날을 위해 기절하듯 잠을 잤다.
그 두 명의 부장은 남을 괴롭히는 걸 즐기는 성향이었다. 꼭 그 일을 해야 되서가 아니라 일을 하며 괴로워하는 걸 지켜보며 좋아했다. 교사들은 매해 학년 희망서를 적어 원하는 학년을 배정받게 되는 데 다들 그 부장들을 피해 다른 학년으로 도망가고, 그 기피대상 1호인 두 자리를 어린 우리 둘이 채우게 된 거였다.
불이 다 꺼진 컴컴한 밤의 학교가 그렇게 공포스러운지 미처 몰랐었다. 스릴러에나 나올 법한 칠흑 같은 밤의 학교, 교실에 달랑 불 하나를 켜 두고, 무슨 소리라도 나면 소스라치게 놀라며 일했다. 불이 켜지지도 않는 어둠의 화장실을 갈 때엔 참았다가 꼭 K와 같이 가곤 했다. ‘꾸르륵’ 대는 배를 부여잡고 초콜릿 한 두 개로 당을 충전해가며 일했다. 학교 1층에 경비원 한 명이 계시긴 했지만, K와 나에게 소리지르기 일수였다. “남들 다 퇴근하는데 무슨 일이 그렇게 많아??!!!” 라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를 때면 야근도 서러운데 경비원한테까지 혼나야 하는 상황이 더 서글펐다.
내가 하루에 한 끼 먹으며 출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K는 퇴근이 많이 늦은 날이면 근처에서 밥 먹고 가자고 권해왔다. 출출했던 우리는 허기를 달래며 서로 직장인의 서러움을 털어놓았다. 뱃속의 허기보다 온기의 허기를 달랬다. 그러다 보면 그 날의 장르가 ‘인간 극장’에서 ‘시트콤’으로 바뀌기도 하고, ‘다큐멘터리’에서 ‘코미디’로 바뀌곤 했다. 악랄한 부장 두 명에게 갈굼을 유난히 심하게 당한 날이면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불족발’을 찾았다. 그렇게 점점 우리는 친해지게 되었다.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자!”
족발을 먹으며 K가 말했다. 어차피 사표 쓰고 나갈게 아니면 버텨야 했고, 그렇게 우린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며 족발로 우리의 하루 끝에 스스로 보상을 주었다.
4월의 어느 날 퇴근길, 밤에 핀 팝콘 같던 벚꽃을 발견하곤 K가 말했다.
“그거 알아? 우리 올해 벚꽃 핀 줄도 몰랐네. 올해 처음으로 본 벚꽃이 ‘밤 벚꽃’이야. 소름 ~”
힘든 그 해였지만, 같이 버티며 의지되는 단 한 명으로 인해 악몽이 아닌 추억이 되었다. 우린 요즘도 만나면 그 혹한기를 최대의 소재거리로 삼으며 그 날을 떠올려보곤 한다. K 가 없었다면 그 시기가 어떤 의미였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나에게 K는 직장생활의 혹한기를 버텨서 받은 선물 같다. 내일도 그 날을 추억하며 그동안의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려 한다. 7년 전의 눈물방울들이 모여 이제는 파자마 속 웃음이 되어버린 거처럼 지금의 힘듦도 언젠가 초연한 웃음으로 바뀌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