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보다 리액션을 연습하고 있어요
"엄마, 나 이렇게 냉장고에 먹을 것이 많은 게 좋아."
"뭐가 많아? 지금 냉장고에 먹을 게 많아?"
"케이크도 있고, 떡볶이도 있고, 수박도 있고. 지금 엄청 많아."
"...... 그... 그래... 다 꺼내 먹어."
그동안 냉장고가 많이 비워져 있었던 것일까. 혹은 내가 먹을 것을 잘 못 챙겨준 것일까. 딸이 이렇게 말하니 미안한 마음이 먼저 올라온다. 냉장고를 열었을 때 꺼내 먹을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반갑고 즐거운 일인가. 순간 내가 무심했구나란 생각이 비집고 올라온다. 그 짧은 시간에 심사숙고하는 동시에 감정이 요동친다.
요즘 중학교 1학년 딸을 보면 왜 그렇게 미안한 마음에 눈이 시큰거리며 눈물이 차오르는지 모르겠다. 시작은 지난 시간에 대한 후회이다. 왜 그렇게 냉정하게 말을 했는지, 단호했는지, 왜 더 귀담아 들어주지 못했는지, 표현이 서툴었던 시기였는데 왜 기다려주지 못하고 다그치며 답답해했는지, 행동 하나하나에 과하게 예민했는지... 이런 반성이 일어나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지만 너무 늦지 않길 바랄 뿐이다. 그래서 이런 과오를 모두 받고 본 목격자인 첫 딸에게 이제야 그렇게 미안함이 올라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자라줘서. 웃어줘서. 자기를 표현해 줘서 고마울 뿐이다.
"나는 사춘기가 지났잖아."
"너 사춘기 중인 거 아니야?"
"아니야, 요즘 사춘기가 빨라져서 여자 아이들은 초 4부터 중1 까지라고 해. 난 이제 다 끝난 거지."
"아... 그런 거구나."
잠시 시계를 돌려 딸이 4학년이었던 때로 거슬로 가 본다. 딸의 말에 따르면 자기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엄마한테 가장 많이 혼났다고 한다. 혼을 낸 엄마는 기억이 안 나니 이 얼마나 기가 찰 노릇인가 싶다. 그래서 더 미안하다. 4학년의 딸의 모습은 늘 땀이 그득한 벌건 얼굴에 잘 놀고 들어온 모습이다. 마스크 자국으로 탄 얼굴은 흡사 아기 곰이 연상되는 투톤이었다. 그 귀여운 얼굴로 문제집 겨우 풀고 혼나고 책 안 읽어서 혼나고 그랬나 보다. 아니 그랬다. 2년 후 그 시절을 보내고 있는 자기 동생과 엄마가 실랑이하는 모습을 본 딸이 그런다. "엄마는 나 혼낼 때와 어쩜 하나도 빠지지 않고 똑같이 그래. 나 정말 놀랬잖아."
흠... 엄마도 놀란 건 마찬가지다. 내가 그랬구나. 시간이 지났는데도 똑같이 나는 변하지 않았구나. 아니 더 퇴보했구나. 너희는 자라는데 여전히 나는 배우지 않고 내 것이 옳다 했구나. 자연스럽게 군림했고 당연하게 요구했구나. 그리고 지금도 뻔뻔하게 원하게 있구나. 내가 원하는 것을 하기를, 해 내기를. 말로는 건강하게 자라고 하고 싶은 것을 찾아라 하면서 애들의 공부력에 답답해하며 속도를 요구했다. 때로는 세련되고 때로는 본능을 제어하지 못하고 극악스럽게. 여전히 미숙하구나.
다행스러운 건 아이들에 대한 관계에 대해 내가 힘이 많이 빠졌다는 것이다. 이건 의도가 아니라 자연적인 섭리에 근거한다. 일일이 챙기기가 (아마도 잔소리로 들릴 일들이겠지) 어려웠다. 체계와 원칙을 두고 사는 게 나조차도 힘들어졌다. 나이가 들어가니 내 몸 하나 챙기기도 벅찬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힘이 빠지니 뻣뻣했던 일상이 조금 유연해졌다. 아이들은 나를 이해하는지 적응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서로가 편해진 것이 있다.
이은경 선생님의 <나는 다정한 관찰자가 되기로 했다>에서는 부모와 아이들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지지하고 응원하는 관찰자가 되는 관점을 짚어준다. 전체적으로 말이 절제되어 있음이 보인다.
서로가 서로에게 다정한 관찰자가 되어주는 삶.
각자의 삶의 여정을 따뜻한 눈빛으로 격려하는 삶.
실수와 실패에도 섣불리 개입하거나 꾸짖지 않는 삶.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하며 서로 도움을 청하고 건네는 삶.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희생이나 복종을 강요하거나 기대하지 않는 삶.
우리가 생각을 표현할 때 비언어적 표현이라는 것이 있다. 공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시선, 표정, 몸짓, 자세가 이에 해당하는데 이 비언어적 표현의 특징이 본능적, 자연적이라는 것이다. 말은 화가 안 났다고 해도 화난 표정, 몸짓은 숨길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어보다 이 비언어적인 표현을 더 신뢰한다고 한다. 본능적으로. 부모와 아이와의 관계 안에서의 이 관찰자라는 시점은 이 비언어적인 표현이 빛나는 때인 것 같다. 더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워서 숨길수도 없지만 있는 나의 진심 또한 자연스럽게 전달된다. 정제되고 논리적인 말보다 더한 힘이 있다고 한다.
"엄마 있잖아. 내가 아는 애 엄마가 자기 아들 릴스를 인스타에 올리는데 팔로워가 1만이 넘어."
"중학생 아들을 인스타에 올린다고? 그게 말이 돼. 걔가 그걸 찍게 둬. 말도 안 돼."
'아니야, 진짜야. 이거 봐봐."
"진짜네. 신기한 집이네."
"그래서 말인데... 나도 계정 하나 더 파서 엄마의 일상을 올리고 싶어. 엄마 너무 웃기거든. 지금 엄마 모습도 올리면 딱이야. 올리면 금방 만팔 될 거 같아."
"... 뭐래."
뭐라고 리액션을 해야 하는지... 어쨌든 비언어적으로 충분히 표현했다. 같은 반 친구 인스타에 호기심을 보였고 재미있어했고 황당해했다. 부계를 더 만들고 싶은 아이가 나한테 허락을 구해준 것에 고마워했고 또 슬그머니 자금 계정으로 충분함을 눈으로 보였고 나를 팔아서 계정을 만드는 것을 거절했다. (만팔 안 부럽거든.) 이런 시시 껄껄한 이야기를 환영하고 즐거워하기로 했다. 딸의 즐거움이 반짝반짝 빛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오늘도 최대한 웃기게 반응하는 연습을 한다.
*그나저나 딸은 내가 자기 이야기 쓴 거 알면 뭐라고 할까. 마음 같아서 연재북을 만들고 싶지만 참는 줄 알길. 너 얘기 빼면 글감이 없다. 그러니 야구, 테니스, 운동 쓰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