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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몽에이드 Jul 16. 2024

여름휴가를 갈 수 있을까

"이번에 여름휴가는 8월에 써야 할 거 같아."

"그래? 성수기라서 어딜 가도 힘들 텐데."

"그래도 놀 때 놀아야 하지 않을까." 

"검색해 볼게." 

(잠시 후) 

"성수기라서 국내든, 해외든 거의 2배 가격이네. 교통비, 숙박비가 이러면 먹는 것도 편하게 못 먹을 거 같아. 휴가 꼭 가야 해?"



이게 휴가를 가고 싶다는 이야기인지, 가기 싫다는 이야기인지 남편은 알아들었을까. 나조차도 해답을 모르겠는데 남편이라고 알까. 7, 8월 성수기에 여름휴가를 써보지 않아서 이 기간에 여행을 잡으려니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특히 예산이 어마하다. 여름휴가를 과연 갈 수 있을까. 




결혼 후 남편과 극한의 다름을 발견한 것은 다름 아닌 여행이었다. 파워 J형인 나의 여행은 8할이 계획이다. 갈 곳을 정하는 것부터 숙박, 교통, 맛집, 활동 등을 계획하는 그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 그거 하려고 여행 가는 것과 다름없다. 검색하면서 행복해하고 고민하고 결정하면서 행복해한다. 하지만 남편에게 여행은 묻지 마 여행 그 자체였다. 이런 식이다. 


"다음 주에 여행 가자." 

"뭐라고?"

"다음 주에 여행 가자고."

"어디 갈지 어떻게 갈지 계획도 없이?"

"그냥 가는 거지. 계획이 뭐가 중요해." 

"어디로 가는데?"

"어디든 다 좋아." 


문제는 이 인간이 진심이란 것이다. 느닷없이 날짜를 들이미는데 본인 직업적인 특성상 그렇다고 해도 이 상황이 감당이 안 됐다. 어이가 없고 그저 화가 났다. 이걸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설명해야 하는지 가늠이 가질 않았다. 나에게 계획하는 시간을 주지 않은 여행을 제시하는 남편과의 마찰은 매 해 여름 빅 이벤트였다. 



한 번은 남편에게 당신이 어디 갈지 정하고 숙박 예약까지 다 하라고 했다. 도저히 나로선 그 짧은 시간 동안 계획을 세울 수 없었다. 정말이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한 말이었는데 남편은 한 시간가량 검색하더니 제주도 비행기, 숙박을 다 정했다고 몸만 오라고 호언장담 하었다. 몸만 따라간 여행은 더 가관이었다. 남편에겐 맛집 검색이란 없다. 길 가가다 괜찮을 것 같은 음식점을 들어간다. 

"나름 다 뜻이 있어. 밖에 주차된 차들 봐봐. 많지. 맛집이야." 



그때 확실히 알았다. 남편에게 내가 원하는 계획을 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 후로 나는 계획된 여행 날짜와 장소를 남편에게 통보하였다. 물론 가용한 날을 적어도 한 달 전까지는 확보해 달라고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괜찮은 여행을 평소에 틈틈이 검색하는 것을 계획했다. 이는 꽤 괜찮은 휴가 전략이었다. 6월~11월까지 언제 휴가가 떨어져도 여기 가볼까 제시할 수 있게 준비를 했다. 검색하다 일종의 반짝 특가로 여행을 가게 되면 남편은 과감하게 제하고 동생 가족, 혹은 친구 가족과 미련 없이 떠났다. 



그렇다면 남편은 늘 계획 없이 몸만 가는 걸까? 언젠가 여행을 가려고 짐을 싸는데 남편이 비행기에서 읽을 거라고 서너 권의 책을 넣었다. 5살, 7살 애들을 데리고 여행 가는데 본인 책을 읽을 시간이 있다는 게 말이 되는가. 책 말고도 짐 쌀 것은 차고 넘친다. 펄펄 열을 내는 나와는 달리 여행지에서 남편은 책도 읽었고 패러글라이딩도 혼자 가서 타고 또 아침 일찍 일어나 쇼핑을 나갔다. 계획한 나보다 어떻게 더 신나게 놀 수 있는지 정말 극강 P, 인식형 대단하다. 대단해. 



그럼에도 남편의 쓸모는 여행지에서 빛을 발하는 반전이 있다. 나는 길치에다 돈 계산에 약하다. 환율 계산까지 더해지면 버퍼링이 길어지며 바보가 된다. 남편은 길 찾는 건 일도 아니고 계산은 본능이다. 여행지에서 내비게이션과 돈 관리를 남편에게 맡길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물론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움직이면서 "거기 말고 여기 가보자. 여기가 더 맛있겠다." 혹은 "여기 야시장에서 쇼핑하자." 면서 목적지와 예산과 다르게 움직이지만 그 정도는 여행의 묘미라고 생각할 수 있다. 맛없는 데서 먹어보고 낯선 길에서 놀기도 하고 적당히 버라이어티 할 수 있다. 여행에서 기억에 남는 것들은 계획되지 않은 일들이 많지 않은가. 나는 신나게 계획한 걸로 8할을 이미 완성했으니까. 


  



계획된 여행 소스도 없고, 딱히 가고 싶은 곳도 없고 이번 여름휴가 날짜는 다가오고... 가고 싶으면 어떤 방법으로도 갔을 텐데 딱히 움직일 마음이 없는 거 같다. 애들 성화로 다녀올 만도 한데 애들도 뜨뜻미지근하고 결국 올 여름휴가는 무계획, 무실행이 되어 버릴 거 같은 느낌이다. 그럴 때도 있지 않은가. 올 여름은 조금 느긋하게 집에서 남편의 P가 활약 못하게 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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