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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씨 Mar 23. 2021

소설을 쓰다

자유롭게

소설을 쓴다. 내 얘기가 아닌 내용으로 글을 쓴다. 소설의 내용이 내가 겪은 일인지, 허구의 이야기인지 아는 사람은 소설을 쓴 작가밖에 없다. 소설 속 인물이 누군가를 죽였다고 실제 누군가 죽은 것은 아니다. 주인공이 사랑에 빠졌다고 작가가 사랑을 해본 적이 있다고 여길 수도 없다. 작가와 소설은 다른 것이다.


소설을 쓰는 사람에게서 전혀 새로운 내용의 소설이 태어날  있을까.  인간이 무에서 유를 창조할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유에서 유를 찾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자신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을 현실로 꺼내놓을  없다. 아무리 천재적인 작가라 할지라도, 신의 계시를 받아 쓰는 것이 아닌 이상 작가 자신의  속에서 무언가를 끌어와 세상에 풀어놓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소설로부터 자유로울  있는가. 소설  인물의 비위와 비행, 배신과 탐욕, 무지와 불의에서 자유로울  있는가. 그것은 작가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작가가 분노에 대해 적었다고 분노에 찬사를 내리는 것은 아니다. 작가가 유혹에 대한 소설을 썼다고 유혹하는 삶을 찾아 헤매는 것은 아니다. 문학 수업을 듣는 어느 날이었다. 공부하는 소설 속 주요 등장인물은 바람둥이 남성이었다. 한 여자의 마음을 훔쳤다가도 금세 다른 여인에게 스스로를 내던지는 인물이었다. 함께 공부하던 문우 중에는 작가를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다. 대체 어떤 생각을 하기에 이런 인물을 만들었냐는 것이었다. 나는 소설 속 인물이 바람둥이인 것을 두고 왜 작가를 비난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소설이 무엇인가. 허구의 이야기를 통해 현실과 세계, 인간의 모습을 비춰보는 것이 아닌가. 소설과 등장인물이 추악한 인간과 세상을 드러내고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소설로서 성공한 작품이지 않은가. 우리 사는 곳이 아름답고 따뜻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모르는 어른은 없다. 작가는 어떤 인물의 삶을 통해 세계의 어떤 지점에 대해 함께 고민해보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악인의 승리와 선인의 패배를 두고 함께 이야기해보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을 두고 작가라는 인간이 어떨 것이라고 여기면 곤란하다.


물론 작가의 삶과 여적이 그의 내면과 심리를 보여줄 수도 있다. 작가가 아무리 노력해도 소설 속에서 자신의 그림자와 채취를 감추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작품으로 작가의 내면세계를 예측해보는 시도도 있다. 하지만 소설이란 , 하나의 작품이란 작가가 경험하고 이해한 세계만을 반영하는가? 작품은 작가를 결코 넘어설 수 없는가. 우리가 소설을 읽으며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는 작가의 생각을 완벽히 이해하는 것까지 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작가가 작품을 완성한 순간 작품은 작가의 삶과 별개가 된다. 작품 속 세상은 더 이상 작가의 세상이 아니다. 작가는 작품을 뒤로하고 새로운 경험을 하며, 또 다른 고민을 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매일 다른 사람이 된다. 그가 남긴 소설은 작가를 떠나 새로운 독자를 만난다. 독자는 자신 만의 세계를 가진 특별한 존재로 유일무이하다. 소설과 독자의 세계는 독서를 통해 융합하며 다시금 사유의 창조를 이룬다. 그래서 작가가 예측하지도, 알 수도 없는 경험들은 각각의 독자들에게서 자라난다. 같은 것을 두고 우리는 모두 다른 결론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하나의 이야기가 해피엔딩을 맞이해도, 베드 엔딩으로 끝나도 상관없다. 누군가에게 희망을 전달하던 절망을 전해주던지도 소설의 가치를 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조금 더 자유롭게 쓰고 싶다. 내가 창조한 이야기를 두고서 누군가 비난하더라도 용기 있게 쓰고 싶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삶을 조금이라도 드러내고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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