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1 - 12.26

감염내과 파견

by 그라스데오

아직 시스템 구축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건지, 모든 병원들이 이런 건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다른 전공의들과 이런 것에 대해 이야기를 딱히 나눠본 적도 없다. 그나마 연초에는 윗년차와 같이 당직을 서게 되어서 모르는 것들에 대한 도움이라도 받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옆에 붙어서 일을 도와주기보단 필요할 때 전화하여 도움을 받는 방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사실 1월이 되면 윗년차 선생님들은 다들 국가고시 공부를 하러 떠나기 때문에, 그 이후로는 도움을 받을 기회가 줄어들긴 한다. 당직인 교수님들이 계시긴 하지만, 혹여나 전화를 하면 왜 전화를 했냐며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어버리는 게 대부분이었다.


의학적으로 순수하게 모르는 일이면 혼나더라도 도움을 청하는 것에 딱히 억울함은 없다. 배워야 하는 입장이니 감수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늘 있었던 일은 정말 너무나도 억울한데, 이전에 친구가 해줬던 말이 생각나서 그냥 일기에만 적어 놓고 잊으려고 한다.


내과 파견이기 때문에 당직 때에는 전병원 내과 환자들을 다 보게 되어있는 구조이다. 때론 너무나도 환자가 많아서 한 시간도 제대로 못 자는 경우가 있는데, 오늘은 의학적인 문제 때문에 사건이 발생한 게 아니었다. 항암 치료를 받기 위해 종양내과로 입원해 있던 환자에 대한 연락을 병동에서 받았다. 환자가 아프거나 활력징후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닌데, 그냥 한번 와주실 수 있냐고.


너무 바쁘고 짜증도 났지만, 이런 요청은 흔한 것이 아니었다. 전화로 전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겼나 보다 해서 병동으로 빠르게 가보니, 환자가 오만 성질을 다 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본인은 퇴원을 해야겠으니 담당 교수한테 연락하라고. 병동은 이미 교수한테 여러 번 연락을 한 상황이었지만, 이미 퇴근 시간은 한참 지났던지라 당연히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환자에게 뭐라도 진정을 시켜달라 하여, 최대한 침착하게 오늘 밤사이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니, 그냥 5-6시간만 깜빡 자고 나면 다음 날 아침에 교수님이 올 것이고, 퇴원시켜 줄 것이라고 거듭 설명했지만,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 정도 사건이었으면 그러려니 할 수 있었는데, 옆에서 환자를 진정시키려고 부단히 노력을 하던 아내분의 마지막 말이 기분이 나빴는지, 환자가 손을 번쩍 들어 아내를 때리려고 한 것이었다. 너무 놀라서 그 사이에 끼어들어 뭐 하는 거냐고 막아서니, 환자의 모든 분노가 나에게 향하기 시작했다.


어린놈이 떽떽거린다니, 네가 뭔데 자꾸 말을 하고 노려보냐느니.


결국 보안 직원들이 올라와서 소강상태가 되었지만, 문제는 그다음 날이었다. 담당 교수가 면담을 하자고 나를 부른 것이었다.


특별히 내가 화를 내거나 문제 될 행동을 하진 않아서 법적인 책임이 있을 거라는 걱정은 없었는데, 내가 너무 기분이 나빴던 건 교수의 태도였다. 40분을 넘게 기다리게 해 놓고,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무슨 상황이었는지, 내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고, 본인 환자와 다퉜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하나만으로 무조건 내가 잘못했다고 몰아붙이면서 다음부턴 그러지 말라며 하대하며 자기 할 말만 하고 거의 내쫓듯 한 것이었다.


이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고, 솔직히 내 억울함을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녹취 파일도 다 있었고, 조금만 들어봐도 욕을 끝없이 하던 것은 환자인 것을 쉽게 알 수 있었지만, 교수는 그런 건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저 본인은 좋은 교수여야 하고, 후배이자 같은 의사, 본인이 책임지고 양성을 해야 하는 전공의를 불러 놓고 자기 할 말한 하는 그런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모든 교수가 다 좋을 거라고 생각은 안 했지만, 적어도 전공의에게는 잘해줄 거라고 생각했던 내가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나마 위안에 된 것은 해당 교수는 이미 성격이 안 좋기로 유명했던 놈이었다. 괘념치 말라고. 정말 전공의에게는 억울함이나 답답함, 이성과 논리는 없고, 그냥 주어진 일을 무사히 수행해 내는 것 밖에 없나 보다. 게다가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내과계 교수님들 사이에 이미 유명인사가 되어버렸다고.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이런 경우에도 폭행죄가 성립될 수 있으니 경찰에 신고를 하라고 하는데, 일이 커지는 것을 병원이 당연 원하지 않으니, 그냥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한다. 의사로서의 보호 따위는 우리나라에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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