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 카메라가 다시 유행하면서 늘 새로운 것에만 흥미를 갖던 사람들이 '추억'과 '그 시절'이라는 단어가 담긴 아날로그로 모여들고 있다. 사진을 찍어 현상을 맡기고 나면 어떤 사진이 나올까 궁금해했던 그 시간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있다. 또 시를 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한낱 말장난 같은 짧은 글일지라도 원하는 종이에 원하는 펜으로 한자 한자 눌러쓴 시들이 모여 사색을 하는 시간들을 만들었다. 디지털에서 다시 아날로그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아날로그를 만들어가는 것처럼 영화 <시인의 사랑>은 조금 색다른 아날로그, 감성을 통해 그들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시로 돈을 벌어 먹고살아야 하는 시인(양익준)은 제주도 어딘가에서 아내(전혜빈)와 함께 살아간다. 그의 시는 슬픔을 몰랐던 것 때문인지 돈이 되지 않는다. 겨우 얻은 직장은 한 초등학교에 방과 후 글쓰기 선생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인을 너무나 아끼고 사랑하는 아내는 언제나 좋은 것들을 먹인다. 아이를 갖기 원하는 아내는 시인을 병원으로 끌고 간다. 결국 인공수정 절차를 시작하게 된 시인은 자신의 처지를 불쌍히 여긴다. 그렇게 시를 겨우겨우 내뱉다 도넛 가게에서 한 소년(정가람)을 만나게 된다. 길을 가던 할아버지를 보고 중얼거린 소년의 한마디는 시인을 사로잡았고 비로소 시인은 슬픈 시를 쓰기 시작한다. 시의 영감을 주는 존재 이상의 감정을 느낀 시인은 점점 그 소년에게 다가가지만 아내의 임신과 그 소년의 거부로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게 된다. 시간이 꽤 지난 후 다시 만난 둘은 서로의 길을 응원하며 각자의 삶으로 녹아들게 된다.
이 작품에 대한 아무 사전 지식 없이 관람했더니 가장 먼저 든 의문은 '저게 진짜 사랑인가?', '시인과 소년이 정말 동성애자 혹은 양성애자인가?'였다. 가장 마지막에 든 질문은 '왜 시인은 소년과 함께 하지 않겠다는 결론을 내렸을까?'였다. 지금부터 이 세 가지 물음에 대한 개인적이고 솔직한 글과 이 영화에 대한 세부적이거나 혹은 전체적인 것에 대해 이야기해보겠다.
과연 시인과 소년이 사랑을 했던 걸까. 동정과 사랑을 오갔던 그 많은 표현과 베풂들 이 소년이 느끼기에 어떠했었는지가 중요할 듯싶다. 소년은 시인이 건네는 과일, 통닭, 매트에 대해 욕설과 함께 자길 동정하냐 물었다. 시인이 확실하게 대답을 하지 못한 이유는 자기 자신도 지금 하는 행동이 무언지 잘 몰랐을 것이다. 그렇게 오락가락하는 와중에 소년을 통해 슬픈 시어들을 자신의 글에 녹이면서 그 알 수 없는 감정의 응어리가 점점 커졌을 것이다. 사실 시인의 상황이나 소년의 상황이나 크게 다를 게 없다. 월급 30 벌어오는 처지에 아이를 갖기 위해서 인공수정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주변에서는 '네 시가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다'라는 소리 나 듣는 시인과 몸져누운 아버지에 시장에서 장사하며 전전긍긍하지만 고스톱에 빠져사는 어머니 아래서 친구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소년. 그렇게 동질감을 느끼면서 서로를 마주 향해 갔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사랑이다. 그 둘은 사랑했지만 그 사랑이 온당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사랑은 교통사고라는 말이 있는데 이건 거의 불법 유턴 교통사고다. 내가 문학적 감수성이 적고 시에 대한 깊은 조애가 없어서 그런지 시인의 목덜미를 확 잡아끌었던 소년의 그 한마디가 어떤 울림을 줬는지 그게 시인에게 어떤 의미인지 잘 와 닿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시를 돌아보게 만드는 정도까지였다. 서로가 사랑인 줄 몰랐던 그 사랑은 그리움이라는 단어로 바뀌어 앞으로 살아갈 많은 날들에서 어깨를 툭툭 쳐 뒤돌아 보게할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과 아내는 사랑일까. 시종일관 아내에게 무심한 태도를 보이는 시인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지금의 아내가 아닌 다른 그리움의 존재를 떠올린다. 아내가 떠나지 말아달라고 애걸복걸을 해도 '이런 건 사랑이 아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집 밖으로 나선다. 아내는 시인을 사랑했을지 모르지만 시인은 아닌것 같다. 다소 과격한 표현으로 시인을 사랑하긴 했지만 누구보다 그의 시를 믿어주고 언젠가 함께 웃을 날을 기다리고 기다리며 그에게 모든 사랑을 내어주었다. 애초에 아내는 돌아오는 사랑을 바라지도 않았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니까. 그래도 마지막 예의는 지켜주길 바랐던 아내는 결국 시인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것마저도 아내의 사랑이었다.
시인과 소년이 정말 동성애자 혹은 양성애자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할 거 같다. 퀴어 영화인지도 몰랐던 내게 정말 혼란스러운 부분이었다. 사실 이 영화에서 이건 중요하지 않은 설정이다. 영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랑'에 관해 이야기한 작품이지 그들이 게이인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니까. 많은 퀴어 영화를 본 적은 없지만 대부분의 작품들이 이들 또한 사랑인 것을 말하는 것처럼 이 작품도 그렇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사랑했던 그들이 마지막을 함께 하지 못했을까. 왜 시인은 같이 가자는 소년의 말을 뿌리쳤을까. 우선 가족 때문은 아니다. 아내가 임신 중에도 떠난 시인이니까. 그렇다고 아이가 생겨서 가장으로서 책임감이나 경제적 보탬이 되어야 하기 때문도 아니다. 삼천만원을 아내 몰래 모아 소년에게 건넨 시인이니까. 시인이 소년을 따라나서지 못한 이유는 소년을 그리움으로 남겨두기 위해서다. 시인에게 사랑이란 그런 그리움의 형태인 것이다. 아름답지 못할 그들은 사랑은 그렇게 함부로 아름다운 것들이 되어 그 둘을 제외한 모든 것들을 지워버렸고 그 지운 후 남은 것들은 서로에게 향했던 마음들의 부스러기가 되었다.
생각보다 많은 웃음을 선사한 <시인의 사랑>은 의외로 많은 것들을 보여준다. 물론 당연하게 가장 큰 부분이 바로 시다. 슬픔을 비로소 알게 된 시인과 사랑에 굴복한 아내,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 소년, 죽여달라는 병든 환자, 죽음을 기뻐하는 여자를 보여주면서 시를 노래하는 이 영화는 시가 가진 힘과 기능보다 각자 시가 보여줄 수 있는 세상을 비춰준다. 아쉬운 점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필름 카메라 하나 없이 아날로그 감성을 한껏 풍기고, 관객을 그리움의 바다로 잠기게 한 <시인의 사랑>은 쓸쓸하지만 맑은 가을에 잘 어울리는 작품임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