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봄이 올 테니 <소공녀>

by 영화요원

다른 나라에서 긴 겨울을 보내고 있자니 과연 이 겨울에 끝이 있긴 할까 생각됐다. 낡은 상자에서 주섬주섬 꺼내 입은 패딩은 11월부터 4월인 지금까지도 다시 상자에 들어갈 생각을 안 한다. 그럼에도 봄은 온다. 따뜻한 냄새가 나고, 거친 손과 발은 다른 사람들은 어루만져줄 만큼 부드러워진다. 내게 이번 겨울은 어떤 겨울이었을까. 너무나도 추웠을까 아님, 외롭고 마음 하나 오갈 데 없어서 시렸을까.

가사도우미로 생계를 이어나가는 미소(이솜)는 사랑하는 것 세 가지가 있다. 담배, 위스키, 그리고 남자 친구 한솔(안재홍). 이 셋만 있으면 살아갈 수 있는 미소는 자신의 삶에 큰 불평불만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해가 되고 담배값, 위스키 값, 방값이 올랐지만 오를 기미가 안 보이는 일당 때문에 미소는 사랑하는 것들 대신에 집을 포기하기로 한다. 집을 포기한 미소는 전 대학교 밴드시절 친구들을 찾아가 하룻밤을 청하게 된다.


다른 건 다 올라도 내 주머니로 들어오는 돈은 안 오른다. 그게 참 슬프다.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미소에게 꼭 값을 받아내고 딱 그만큼의 기쁨을 준다. 소비는 처절하지만 정직하기에 쉽게 중독된다. 미소는 담배에, 위스키에 어쩌면 소소한 그의 남자 친구에게까지 중독되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그녀는 포기해야 할 것들 가운데 가장 안전한 집을 포기하기로 한다.

달걀 한 판과 함께 악의 없는 미소를 띤 그녀를 마주하게 된 친구들은 대책 없는 그녀를 난감해하기도 하고, 옛 추억에 잠겨 소곤거리는 밤을 보내게 된다. 사실상 집이 있는 이 모든 친구들은 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복하지 않다. 집이 행복의 근간이 되진 않겠지만 집이라도 있어서 망정이지라는 사정들을 하나하나 보고 있자니 모두의 인생이 비참하게 다가온다.


아내의 부재로 집이 슬픔의 공간이 되어버린 대용에게, 시월드와 남편의 무능력함으로 집이 답답함의 공간이 되어버린 현정에게, 제대로 된 집 한 채의 의미가 너무 아프게 다가오는 민지에게 미소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복을 선사한다. 깨끗한 집. 원래 있던 자리로 돌려놓고 이 집에 처음 온 물건처럼 닦고 털어내면 미소는 가질 수 없지만 다른 이들이 갖게 되는 깨끗함과 본연의 모습이라는 행복을 선물한다.

가진 것 없이 태어난 인간이 무언갈 가지려고 하면 못난 모습이 자주 발견된다. 내 이름 석자를 새겨 넣으려고 일평생을 집 대출금으로 갚는 내 집 마련의 꿈을 가진 이들에게 지금 당장 뛰쳐나와 행복을 찾으라는 말이 아니다. 누구에게는 집이란 공간이, 가족과 함께 따뜻한 밥을 먹고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밤을 함께 보낼 수 있는 휴식과 안식의 공간일 수 있다. 다만 미소에게는 그것 말고도 더 행복한 것들이 집값보다 조금 더 저렴했고, 더 컸기 때문일 것이다.


밴드는 박자를 책임지는 드럼과 음악의 깊이를 제공하는 베이스, 다양한 소리를 주는 키보드, 메인 멜로디를 연주하는 기타,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조율해나갈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아마 미소는 이 밴드에서 매니저가 아니었나 싶다. 선택과 집중, 투자과 포기를 하는 역할을 했던 그녀의 인생은 대학교 밴드부라는 것에서 일단락되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져온 것이다. 각자의 맡은 바를 충실히 했던 그 짧고 흔들림 없던 시절을 추억으로 남기는 사람들과 아직까지도 그 추억을 만들어가는 사람과는 당연히 이해관계가 같을 수가 없다. 미소에게 정신 차리라는 따끔 한 충고는 '결국 정신 차린 네 모습은 어때?'로 더 세게 돌아간다.

남들 다 취직해서 자리 잡을 시기에 수입이 안정적이지 않은 일을 한다고 해서, 심지어 돈이 더 들어가는 일을 한다고 해서 한심한 인생이 아니다. 물론 재미없는 회사에, 갖은 업무 스트레스 속에서 일하는 인생도 누구에게 비난받을 인생은 아니다. 다만 행복의 잣대를 스스로에게 거짓으로 대면서 다른 이들의 행복의 잣대를 이렇다 저렇다 안주거리로 삼고, 본인 인생과 비교해서 위안을 얻으려는 인생이야 말로 한심한 삶이라고 생각된다. 결국 '네 인생도 괜찮다'는 그 말이 모두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이다. 지금의 나도 물론.


미소는 백발이 되지 않으려면 평생 약을 먹고살아야 한다. 돈이 없다는 게 하얀 머리카락으로 내비쳐지는 게 어떤 심정 일까. 늙어버린 모습 안에 상처로 자라지 못한 소녀가 누구에게 따뜻한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봄이 오면 조금 나아지겠지. 그 봄은 언젠가 오기에 또 내 옆에 여전히 행복이 남이 있다는 걸 안다면 조금 추워도 견딜 수 있지 않을까. 그녀의 인생의 좋은 기회가 오지 않더라도 그 여전한 미소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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