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에서 들려오는 사투리에 갑자기 문득 귀가 밝아져, 벌써 경상도인가, 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고향에 온 것 같은 안도감이었다.
본디 내게 고향같은 건 없었다. 출생지는 있지만, 군인 아버지를 따라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보니 고향이라 부를 장소가 없는 것 뿐이었다. 내가 지냈던 여러 곳들 중에 특히 애정이 가는 곳은 진해였는데, 어렸을 적 2년정도 밖에 산 적은 없지만 그 때의 친구들이 여지껏의 손편지 친구로 이어졌기 때문인지 더 각별해졌는지도 몰랐다.
부산은 어머니의 고향이었다. 아버지의 고향은 전라도였다. 경상도와 전라도가 만나 화개장터를 이루게 된 결실이 나였다. 나는 경상도도, 전라도도 아닌 그 중간의 어디쯤 되는 사람이지만, 이러한 이유들로 인하여 경상도를 마음의 고향 쯤으로 무의식적으로 여기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전라도는 고향 범위에 들어있지 않는 것이 아버지한텐 못내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어떻게 보면 내가 이러한 최초의 원인은 아버지이므로 미안함은 덜 가지기로 했다. 사족으로 덧붙이자면, 내 출생지는 인천이다. 그러나 인천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으므로, 인천은 내가 태어난 땅임에도 불구하고 고향의 후보에도 들지 못했다.
사실 태어난 땅이란 건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 땅의 명맥을 이어 유지하는 것, 그것이 사람들이 느끼는 고향에 대한 참 뜻이라고 생각한다. 그 땅, 물, 공기, 피, 냄새, 음식, 단어가 그 곳의 사람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첫 딸로서, 생득적인 것은 아버지에게 많이 물려 받았다면, 후천적인 것은 어머니에게서 더 많이 물려 받았다. 딸이라면 피할 수 없는 자식으로서의 수순을 착실하게 밟고있는 것이다.
기차에는 서울말보다 경상도의 말이 더 많은 비율로 채워져 있는것은 새삼스럽게 생소하면서도 즐거운 기분이었다. 정말 건전하게 즐거운 기분이었다.
참 이상도 하였다. 이방인의 신분으로 고향을 느끼는 기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