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도 모 아니면 도

by 김소영


때는 2018년 8월. M과 나는 동네 배스킨라빈스에 앉아, 달달한 아이스크림을 무자비하게 퍼먹고 있었다. 유난히 더웠던 여름. 얇은 옷 위로 훤히 들여다보이던 실루엣은 애써 외면한 채, 달달하고 시원한 맛을 목구멍으로 넘기기 바빴다. 아이스크림은 곧 질퍽하게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처음 형태는 온데간데없이 온갖 색이 섞여 회색빛이 되어버린 액체. 입안에 불쾌한 단맛이 맴돌았다. 익숙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우리 살 언제 빼지?”
M과 나는 금세 시무룩해져 버렸다. 아까부터 애써 외면하고 있던 뱃살이 신경 쓰여 자세를 바로 고쳐 앉았다. 꼭 그렇게 다 먹고 나면 기분이 안 좋더라. 왜 먹었지, 먹지 말걸.
“5년 뒤, 10년 뒤에도 똑같은 얘기 하고 있을까 봐 무서워.”
이 악순환의 굴레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끝없이 반복하고 있는 우리들의 마음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버렸다. 수차례 반복된 요요를 겪으면서 이제 더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어떤 것도 예전의 나로 다시 되돌려주지 못할 거라는 좌절.


살을 빼겠다고 경험해본 운동만 해도 수영, 복싱, 필라테스, 스쿼시, 홈트레이닝, 헬스, 요가 도대체 몇 개야. 그뿐인가 살 빠지는 데 효과적이라는 디톡스 주스, 비트 주스, 각종 야채, 식욕 억제제. 다 한때였다. 운동은 별별 핑계를 대고 일주일 이상을 꾸준히 나가질 못했고, 살 빼는 데 효과적이라는 음식은 도무지 맛이 없기 때문에 냉장고에서 썩어나갔다. 나 자신에 대한 불신도 날로 높아져만 갔다. 살이야 당연히 빼고 싶은데, 운동이든 식이조절이든 꾸준히 안 하니까. 이번엔 이 운동을 해볼까 하다가도 ‘네가 퍽이나 잘하겠다’라는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도무지 방법을 알 수 없었다. 아니 방법이야 세상천지에 널려 있는데, 그건 이론적일 뿐이고. 어떻게 하면 행동으로, 습관으로 이어지는 걸까. 아침엔 진짜 제대로 마음먹은 것 같다가도, 저녁만 되면 왕성한 식욕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다. 참지 못하고 먹은 것을 소화시키는 밤이면 언제나 자책하며, 내일의 다이어트를 다짐했다. 그것을 몇 년째 반복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지겹고 지겹고 지겨운 일인가. 그리고 얼마나 막막한가.


가장 큰 문제는 이런 사람을 두고 사람들은 쉽게 비난한다는 것이다. 저렇게 자기 관리를 못 해서 어떻게 하느냐고, 저렇게 먹으니 살이 찐다고, 문제를 알면서 해결하려 들지 않는 게 너무 답답하다고. 다 변명일 뿐이라고. 나도 고개를 끄덕인다. 왠지 틀린 말이 아닌 것 같아서. 이미 내가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나를 비난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 악순환을 끊어내는 방법은 그렇게 단순하기만 하지 않다. 오로지 의지의 문제일까? 음식에 중독된 뇌와 혀. 잦은 실패와 반복된 자책으로 낮아진 자존감과 무기력함. 마음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미 몸이 기억해 버린 실패의 경험. 난 안 될 거야. 그럴 때마다 찾는 음식. 음식이 주는 짧고 확실한 위로만이 전부인 것 같은 찰나의 순간을 견딜 수 없는 것인데, 이 사슬이 얼마나 견고한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 사슬은 어쩌다 그렇게 견고해진 것일까.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뚱뚱한 몸’에 대한 차별적 경험이 원인이진 않을까. 다양한 몸이 다양한 방법으로 존재할 수 없게 만드는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뚱뚱한 사람을 향한 그릇된 인식에 맞서 싸울 수도, 싸우지 않을 수도 없는 일. 뚱뚱함을 기피하고, 무시하고, 소외시키는 것이 무례하고 부당하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어쩐지 내 몸이 문제인 건가 헷갈리는 일. 뚱뚱한 게 뭐 어떠냐며 자신 있게 살고 싶지만 자꾸만 숨고 싶은 양가적인 감정에 시달려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나에게 다이어트란 단순히 살을 빼는 행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몸을 쉽게 지워버리는 무수한 차별에 대항하겠다는 의지와 매력적인 몸을 갖고자 하는 욕망 그 어딘가에서 내 위치를 찾으려는 시도이다. 그 둘은 언제나 함께하기를 거부하는 듯 삐걱거리지만 말이다.


M과 배스킨라빈스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은 날로부터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이 4개월이 흘렀다. 어느새 12월이었다. 하지만 변화의 많은 일이 그렇듯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된 건지 알 수 없게 무언가 시작되려고 했다. 그러니까 자꾸 그런 ‘때’를 말한다는 게 우습지만, 어쩌겠는가 그 ‘때’를 짚고 넘어가지 않고서야 이 이야기는 시작될 수 없는 것을. 내가 어떤 영향을 받을지 상상도 못 했던 아주 평범한 날. 회사 점심시간이었다. 평소에 같이 밥을 먹을 일이 없는 언니와 식사를 하게 됐다. 오랜만에 마주 앉아 본 언니는 몇 개월 사이에 몰라보게 살이 빠져 있었다. 자연스럽게 이것저것 물어보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새벽에 헬스장을 가서 운동한다는 것이다. 출근하기 전에 운동한다고요?, 몇 시예요?, 안 피곤해요? 같은 질문을 연달아 쏟아냈다. 언니는 너도 같이하자고 스스럼없이 제안했다. 오히려 아침에 운동하고 나면 더 개운하다는 말도 빼먹지 않고.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아침에도 겨우 일어나서 출근하는 주제에 새벽 운동이라니. 게다가 요즘에는 날씨까지 추워서 이불 밖을 빠져나오는 것이 전쟁 같은데 무슨 새벽 운동이야.


헬스장을 안 가본 것도 아니고 안 다닐 게 뻔해. 그간 헬스장에다 보관해 놓고 안 찾은 신발만 몇 켤레인데. 신발만 기부했으면 다행이게. 꼭 삼개월 이상씩 끊어야 싸다는 헬스장 가격제도에 혹해서 썼던 필요 이상의 돈과 운동을 가지 않는다는 죄책감에 치를 떨던 시간까지. 결과는 언제나 헬스장 기부 천사. 이렇게 앞날이 뻔히 예상 가능한데도 이상하게 자꾸 마음이 끌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벽 운동이라는 점이.


머릿속에 반짝하고 전구가 켜지는 기분. 이 신호는 '앞으로 내가 무슨 일을 벌일 건데, 지금은 모르겠고 미래의 내가 책임져줘!'라는 것과 같다. 정말 오랜만에 누군가에게 '함께'를 제안 받았다는 사실이 나를 생기있게 만들었다. 그냥 단순명료하게 뭐든 같이 하자고 말하는 사람이 필요했던 거였을까. 나를 향한 믿음이든 의심이든 간에 이 막막함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고 싶으면 무엇이든 해봐야 하는 게 아닐까. 게다가 새벽 시간이야 말로 내가 의지만 있다면 가장 안전하게 운동 시간을 확보할 수 있을테고. 이랬다저랬다 하는 마음에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할때면 언니는 포기하지 않고 물어왔다. 언제 올 거야. 그 끈덕짐에서 전해지는 건강한 에너지. 게다가 언니의 마지막 결정타.
“너무 오래 생각하면 못하니까, 그냥 일단 질러버려!”


결국 이주 뒤 나는 퇴근하고 헬스장으로 갔다. 고민 끝에 일단 한 달만 하기로 한 것. 이번 결정도 모 아니면 도라는 건데, 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으니까. 그렇게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얼떨결에 시작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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