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님 앞에 보세요. 한참 내 무릎 언저리를 바라보며 동작을 진행하고 있을 때였다.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똑바로 마주 보기가 어려워 시선을 그쯤 두기로 한 건데, 트레이너가 기가 막히게 눈치를 채고선 앞을 보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그야 물론 내가 올바른 자세로 운동할 수 있도록 지도하는 역할이니 당연한 것을 한 거지만 왜인지 원망스러웠다. 하는 수 없이 내 이마 언저리를 보기로 했다. 내 존재가 가장 덜 보일 수 있는 곳을 바라보는 게 마음 편했다. 저기 저 거울 속에 있는 애는 내가 아니야, 아니어야만 해. 웃기게도 ‘헬스장 안에서의 나’가 도무지 내 모습 같지 않아, 오랜 시간 나를 부정하고 있었다. 씻지 못해 떡진 머리, 퉁퉁 부은 얼굴, 반쪽짜리 눈썹. 그렇다고 운동 가기 전에 샤워할 수도, 화장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적당히 타협해서 나온 건데 절대 편안하지 않았다.
거기까지면 내가 백번 양보하겠는데, 결정적 문제는 이놈의 살이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티셔츠 밖으로 튀어나온 살은 무슨 동작을 하든 흉하게 접혔다. 팔뚝, 배, 허벅지, 종아리 내 몸 곳곳에 시선이 갔다. 세상에 종아리 알은 언제 이렇게 심해진 거지? 어쩌자고 이렇게 되도록 방치했던 걸까? 최악이야 최악.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나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몸을 소극적으로 움직인다. 동작의 가동거리가 사실은 이만큼 더 나올 수 있는데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임할수록 몸은 더 바보 같아지고, 우스워지니까.
게다가 새벽 시간엔 유난히 나란 존재가 훤히 드러나는 기분이 든다. 어떤 인파 속에 내 몸을 숨길 틈이 없다. 이런 내 몸의 움직임을 들키고 싶지 않은데. 내가 한 발을 내딛고, 한 손을 뻗을 때마다 벌거 벗겨지는 기분이든다. 트레이너는 그런 건 꿈에도 모른 채 좀 더 동작을 크게할 것을 지시한다. 그제서야 어쩔 수 없이 조금 더 해보이는 시늉을 한다. 예상했던 대로 몸은 일그러지고, 차마 더는 볼 수 없어 시선을 거둔다.
몸에 대한 일종의 강박이 있다. 건강한 생각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지만, 그걸 안다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모든 여자는 날씬해야 된다는 잣대도 아니다. 그저 나에게만 적용되는 엄격하고 가혹한 잣대. 물론 그것은 주변에서 나에게 들이댄 가혹한 기준으로부터 학습됐을 확률이 높을 테지만. 뚱뚱하다는 이유만으로 얼마나 자주 긴장을 했는지. 내 옷이 아닌 유니폼을 입어야 할 때나 단체로 티셔츠를 맞춰야 할 때면 언제나 싫었다. 옷이 안 맞을까 봐, 내가 더 큰 사이즈를 요구해야 될까 봐. 그게 제일 큰 사이즈인데요? 하며 혐오하듯 쳐다보는 시선에 기가 죽어 억지로 몸을 구겨 넣은 적도 있었다. 내가 뚱뚱한 게 잘못이라고 생각하며서. 지나치게 작게 나오는 옷은 문제 되지 않고, 언제나 지나치게 큰 내 몸만 문제였다.
나를 미워하게 된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예쁜 옷을 입지 못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 작은 사실에서부터 많은 문제가 파생됐다. 옷은 더이상 취향과 개성을 드러내는 수단이 아니고, 벗고 다닐 수 없으니 입는 존재가 됐다. 옷을 고르는 기준은 사이즈만 맞으면, 덜 뚱뚱해 보이면, 평범하면 살 수 있었다. 그런 옷을 걸칠 때면 언제나 나는 허름해진 기분이 들었다. 하물며 뚱뚱한 몸은 오리 보트를 타는 것, 수영장을 가는 것, 놀이기구를 타는 것, 사람을 만나는 것, 직장을 갖는 것 그 모든 가능성을 한없이 뒤로 연기하게 만들었다. 자신이 없었다. 이 몸을 하고선.
살을 안 빼본 것은 아니었다. 대학생이 되었을 때, 철없던 남자 동기들이 지나가는 여자에게 저 여자는 A니, B니 하는 등급을 매기는 모습을 보면서 살을 빼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도 누군가에게 D등급쯤 되는 여자일 것 같아서. 그렇게 처음 시도한 다이어트를 참으로 독하게도 했다. 밀가루도 끊고, 사람 만나는 것도 끊고, 건강한 음식만 먹으면서 매일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운동을 했다. 내가 선택한 모범적인 방법의 다이어트는 나를 절대 살찌울 리 없다고 확신했다. 빼는 것보다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몰랐던 그때는 목표 체중이 되자 마음을 놓았다. 그러자 서서히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요요가 온 것이다. 충격이 컸다. 어떻게 뺀 살인데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다니. 그것이 서러울 때면 음식을 입에 우겨 넣었고, 먹은 것을 자책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나는 그때 ‘네가 그래서 살쪄’라는 비난을 가장 많이 받았다. 네가 그렇게 먹으니까, 그렇게 움직이질 않으니까, 그렇게 의지가 없어서 어쩔래. 그럼 또 그게 맞는 말 같아서 나를 죽도록 미워하는데 힘을 썼다.
이번에 운동을 시작하면서 한 가지 미약하게나마 바라는 것이 있었다. 나를 그만 미워하는 것. 날씬해지면 자신을 미워하지 않게 되는 거냐고, 외적인 것에 너무 집착하는 것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다. 맞다. 집착하게 되어버렸다. 너무 오랜 시간 그 이유를 들어 나를 미워했기 때문에. 적어도 그 이유가 해소될 날이 기다려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래서 요즘엔 운동하러 가려고 준비하는 아침이면 가기 싫은 마음보다 나를 미워하는 것을 그만두는 마음과 싸워야 한다. 평생을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한 채 살았는데, 어디 그게 한 번에 쉽게 될까. 거울 속에 나를 마주하는 것이 덜 불편해질 때까지 나는 앞으로도 자주 괴로울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