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가슴이 부러운가요?

by 김소영

얇은 목 폴라티 위로 비죽비죽 솟은 브래지어 자국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엄마 이거 안 보이는 거 맞지? 등을 거울에 비춰 몇 번이고 확인했다. 반에서 브래지어를 한 친구들이 별로 없던 초등학생 때였다. 나는 친구들보다 뭐든지 빨랐다. 생리도, 속옷을 입는 시기도. 그때는 그 사실이 어찌나 부끄러운지, 단짝 친구한테만 ‘죽어서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 하는 비밀’이라고 새끼손가락 걸고 복사, 사인까지 한 뒤에 겨우 말할 정도였다. 당시 반 분위기가 그런지라 엄마가 처음 브래지어를 사 들고 왔을 때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내 학교생활이 순탄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


하루는 갑갑하고 불편한 브래지어를 벗어 던지고 학원에 갔다. 그때 나는 속옷을 입지 않는 것이 더 편안했고, 오히려 당당했다. 하지만 그런 나를 쓱 훑어본 학원 선생님은 화들짝 놀라며 ‘엄마한테 속옷 사달라고 해. 그럼 아실 거야’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빨개졌다. 아, 밖에 나갈 땐 브래지어를 해야 하는 거구나. 어린 나이에도 내가 속옷을 입지 않으면 그 비난이 엄마에게로 가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필이면 그날은 학교에서 폴라티를 입고 오라고 한 날이었다. 이렇게 몸에 들러붙는 옷은 브래지어 끈이 다 보일 텐데. 옷을 있는 힘껏 잡아당겨 보아도 신축성 좋은 원단은 금방 원래대로 돌아갔다. 엄마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브래지어 하는 게 뭐가 어떻다고 그러냐며 나를 타박했다. 정말 어른들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별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대로 학교를 가는 수밖에.


문제의 체육시간. 우리는 강당을 줄지어 이동 중이었다. 내 뒤에 서 있는 친구들의 시선이 느껴져 목 뒷덜미가 화끈거렸다. 결국엔 사단이 났다. 기어코 친구 한 명이 내 등에 손을 대보았다. 확인하려는 작업처럼 재빨랐고, 자기들끼리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까지도 그 감촉이 선명하다. 순식간에 등 뒤가 오그라드는 것 같은 기분. 그 나이 때 겪는 별 거 아닌 해프닝처럼 느껴질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도 내 가슴에 대한 감정은 그때와 별반 다를 게 없다. 부끄럽고, 숨기고 싶은 것.


큰 가슴이 고민이라고 하면 황당할까. 가슴은 크면 클수록 좋은 것이 아니냐며, 남들은 가슴을 크게 만들려고 수술도 한다는데, 뭐가 고민이냐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여기서 빼먹은 전제가 있다면 ‘날씬한 몸’이다. 뚱뚱한 사람이 큰 가슴을 갖고 있는 것은 하나도 특별하지 않다. 살 빠지면 곧 없어질 존재이거나, 오히려 상체를 더 부하게 만들어 옷 핏을 망치는 주범으로 취급받는다. 그뿐 아니라 다양한 사이즈의 속옷을 보유한 브랜드가 많지 않아 일반 속옷보다 세 배는 비싸게 사야 하고, 여기서도 내 취향에 맞는 예쁜 속옷을 살 수 있는 게 아니라 큰 가슴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지지해주는지 그 기능만을 따져가며 구입해야한다. 움직임에서도 자유롭지 않다. 뛸 때마다 출렁이는 가슴은 수치심을 자극하기에 웬만한 일론 잘 뛰고 싶지도 않다. 같은 사이즈의 가슴일지라도, 처한 환경에 따라 이렇게 대우가 다르다.


헬스장에서 런닝머신 위를 빠른 속도로 걸을 때마다 흔들거리는 가슴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트레이너 앞에서 격한 동작을 할 때 흔들리는 가슴도 창피했다. 운동할 때 스포츠 브라를 입어야 한다는 것은 대부분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큰 가슴이 입을 수 있는 스포츠 브라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후크 없이 그냥 옷처럼 입는 형태의 가장 일반적인 스포츠 브라는 절대 입을 수 없다. 사이즈가 작게 나올 뿐만이 아니라 안정적으로 가슴을 잡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도 이중으로 잡아주는 기능성을 찾아야 하는데 스포츠 브랜드에서 나오는 최대 사이즈는 XL이다. 적어도 컵 사이즈 정도는 명시해 줘야 하는 게 아닐까. 구체적인 분류를 해도 부족한 판에, 저렇게 애매한 기준의 사이즈라니. 물론 사이즈 가이드를 보고 짐작할 순 있지만 말 그대로 짐작이지 도통 감이 잡히질 않는다. 대략 D컵 이상의 여성은 XL쯤으로 입으면 되는 건가하고 착용해보면 백이면 백 사이즈가 맞지 않았다. 스포츠브라조차도 날씬 하고 적당한 볼륨감을 갖고 있는 여성들만 손쉽게 착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런 와중에 지인의 추천으로 쇼크업쇼버라는 브랜드의 스포츠 브라를 알게됐다. 다양한 사이즈를 보유한, 심지어 저렴하기까지 한 곳이라고. 나는 그 길로 예약을 하고 매장을 방문했다. 그곳은 신세계였다. 상담을 해주시는 분은 침착하게 여러 종류의 스포츠 브라와 사이즈를 내왔고, 하나하나 입어보고 뛰어보기도 하면서 가장 적합한 브라를 구매해 갈 수 있게 도와줬다. 직원은 가슴이 클수록 스포츠 브라를 꼭 입어야 한다고 말했다. 가슴은 근육이 없고 지방으로만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이즈가 클수록 작은 움직임에도 엄청 흔들리게 된다면서. 한 마디로 큰 가슴은 일상생활에서도 강렬한 운동을 하는 것과 다름없는 움직임이 발생한다는 것. 그러면서 평소에 입을 수 있는 몇 가지 브라도 추가로 보여줬다. 세상에. 다양한 종류의 체형이 고민 없이 브래지어를 사갈 수 있는 곳이라니. 뚱뚱한 사람을 쉽게 지워버리던 XS~XL 범위의 사이즈 표만 보다가, 감격스러워 눈물이 다날 지경이었다.


이 브라 하나로 내 삶과 운동의 질은 한단계 점프업을 했다. 가슴이 출렁이는 느낌이 사라지자 수치스러움도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이렇게 신나게 뛰어본 게 얼마 만인지. 그때만큼은 뚱뚱한 몸, 큰 가슴이랄 거 없이 자유로워지는 기분이었다. 작은 것 하나 바꿨을 뿐인데 이렇게나 내 몸이 달라보이다니. 구부려 숨기기 바빴던 가슴을 활짝 들어 올렸다. 바른 자세 때문인지, 스포츠 브라 때문인지, 어쩐지 한결 나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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