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25. 찐부자는 돈 자랑을 하지 않는다.

170억 썰의 진실

by 사랑 머금은 햇살

오래전 회식 자리에서, 지인의 170억 성공담을 전하며 부러움과 씁쓸함이 뒤섞인 표정을 짓던 엔지니어가 있었습니다. 이건 그날의 이야기입니다. 세상에는 남의 말을 그대로 믿는 순진한 양들이 많았고, 그런 양들을 노리는 늑대들은 더 많았죠. 그 양들과 늑대들이 떠올라 이 글을 씁니다.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친해진 파트너사의 컴퓨터 엔지니어가 있었다. 뭔가 이상한 자신만의 컴퓨터 개그로 종종 주변을 허탈하게 만들긴 했지만, 거짓말을 아예 못하는 사람이었고, 남들도 자신처럼 거짓말을 못하는 줄 아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회의 도중에 그 엔지니어가 뜬금없이 말했다.

“집에서 쓰는 와이파이 이름을 ’Unable to Connect'로 한번 바꿔보세요.”

“왜요?”

“그러면 외부 사람들이 아무도 연결 안 할 거예요.” 뭐 이런 식이다.


순간 회의룸이 조용해졌다. 그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거 웃기죠?'라는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듯했다. 업무 시간의 대부분을 컴퓨터만 붙잡고 일을 해서일까. 어쨌든, 난 그 사람의 순수함이 좋았다. 하지만 그 순수함이 조금 걱정되기도 했다.


여하간.


어느 금요일 저녁, 프로젝트 수행팀원들 6, 7명이 같이 회식을 하게 됐다. "한주동안 수고 많았습니다."라는 덕담을 시작으로 늘 하던 대로 쏘맥 폭탄주 첫 잔을 만들어 돌렸고, 이후는 막내 직원이 처음 보는 신 기술(?)로 폭탄주를 말기 시작했다. 컴퓨터 기술이던, 폭탄주 제조 기술이던, 여의도에서 기술은 계속 발전하고 있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즈음, 엔지니어가 평소처럼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아는 사람이 170억을 벌었다고 하더라고요. 나하고 동갑인데 난 지금까지 뭐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난 처음에 무슨 썰렁한 농담을 또 하는 줄 알았다. 17억 도 아니고, 170억이라니. 런데 이번엔 개그가 아니었다.


"170억이나요? 뭐로 벌었대요?"라는 질문이 바로 주변에서 쏟아졌다. "주식도 좀 하고, 코인도 하고... 그런데, 자세히는 얘기 안 해요." "와, 좋겠다. 대단하네요."


어느 모임에서나 최고 연장자나 최고 직급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말수는 줄이고 지갑을 여는 것이 철칙이다. 그래서, 입을 가급적 닫고 있으려고 했는데, 그놈의 폭탄주 몇 잔에 정의감이 분수처럼 샘솟았다. 그날, 나는 순진한 양들을 지켜야 하는 목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을 믿나요?" 폭탄주로 데워지던 방안에 난 얼음물을 끼얹었다. 순진한 양들은 목자 앞에서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아니 왜요?"


"부자들은 그런 얘기를 안 해요. 실제로 부자들이 돈 자랑을 피하는 이유는 단순히 겸손 때문만이 아니에요. 돈 자랑하면 결국 '돈 좀 빌려줘. 술 사줘. 투자 좀 해줘.'라는 말만 듣게 되거든요. 터무니없는 돈 자랑의 경우 대부분 사기일 가능성이 높아요. 그 지인이 진짜로 170억 벌었으면, 절대 말하지 않았을 거예요."


"근데, 관심 있으면 저한테도 자기의 코인 투자 방법을 소개해준다는 데요. 그래서, 지금 고민 중이에요." "코인 잘 알아요?" "아뇨. 그냥 돈 많이 번 사람이 추천하니까요." 어휴.


누가 들어도 믿기 어려운 "170억을 벌었다"는 말을 왜 그렇게 쉽게 믿고 관심을 보일까. 찜찜한 냄새가 진동하는데 말이다. 돈뿐만이 아니다. 뭐든지 자랑하고 과시하는 사람은 경계해야 한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은 크게 둘로 나뉜다. "영업하기 전"과 "영업 후".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남의 말을 쉽게 믿던 시절"과 "누구의 말도 안 믿던 시절"이다. 30대 후반에 외국계 IT 회사에서 영업에 뛰어들고서 수많은 사기꾼들을 사람들을 만나고 경험하게 되면서 세상에 믿을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영업하면서 만난 이 세상에는, 남의 말을 그대로 믿어버리는 착하고 순수한 사람도 많았고, 이런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인간들은 더 많았다. 순수하고 선한 사마리아 인들을 맘 아프게 만드는 가장 흔한 말들은,


"운영 자금 좀 잠깐만 빌려줘. 년 **% 이자까지 해서 바로 갚을게." 또는,

"이 회사가 인공지능 관련 신기술을 개발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데, 당신한테만 알려주는 거예요. 지금 투자하세요." 또는,

"이 땅 옆에 도로가 생깁니다. 곧 가격이 최소 지금의 2-3배로 뛸 것입니다. 여기는 무조건 오릅니다."등이었다.


기획부동산의 전화를 받고, 확인도 안 한 채 맹지를 산 지인도 있었고, 특급 정보를 들었다며 작전주에 퇴직금을 몰빵 했다가 전부 날린 선배도 있었다. 돈을 빌려주고 돌려받지 못한 지인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설령 처음엔 진심으로 악의가 없었더라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이 세상은 우리가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확신했던 계약이 막판에 무산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고, 분명 약속했던 납품 일정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일도 숱하게 겪었다. 미팅 자리에서는 "무조건 진행합시다!"라며 악수를 건네던 사람이, 며칠 뒤엔 연락을 피하거나 태도를 바꾼 경우도 부지기수다.


더구나, 영업을 하면서 수없이 마주한 것은 단순한 변심이 아니라, 애초부터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투자금을 끌어모으려 허황된 비전을 늘어놓는 사람, 계약을 따내기 위해 허위 정보를 흘리는 사람, 돈을 빌리고 잠적하는 사람들까지. 그럴싸한 말 뒤에 숨은 의도를 꿰뚫어 보지 못하면 결국 피해를 보는 건 나뿐이었다.


그래서 사람의 말을 쉽게 믿지 않게 됐다. 아니, 믿으면 안 된다. 많은 사람을 상대하는 일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따라서, 사람의 말에 의지해서 가 중요한 결정을 해야할때는, 단 하나의 계획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럴땐, Plan A가 아니라, Plan B, 아니 Plan C까지도 준비해야 한다.



"아빠, 숙제 다하고, 피아노 연습도 다했어. 책도 읽고. 이빨도 닦았어. 굿 나잇. 알러뷰." 밤 9시 30분. 아이가 인형으로 둘러싸인 침대로 자러 가면서 인사한다.


"잠깐만, 너...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애효. 아빠도 참... 아빠가 좋다니까. 어제도 말했잖아." 아이가 엄마가 있는 안방문이 열려 있는지 흘깃 쳐다보고는, 나한테 다가와서 귀에다가 작게 말한다. 사실 자러 갈 때 매번 같은 질문을 한다. 같은 질문에 매일 조금씩 다르게 반응하는 아이의 모습이 난 너무도 재밌다.


"뭐라고? 잘 안 들려. 크게 말해."

"아빠라고!'

"왜?"

"아빠는 나하고 놀아주고, 산수도 가르쳐주고, 혼도 안 내니까. 내 편이니까. 알러뷰~" 엄마가 들을까 봐 다시 내 귀에 속삭이듯 말하고는 토끼 잠옷을 펄렁이며 총총 사라진다.


'그래, 아빠는 항상 네 편이야. 하지만 세상에는 아빠처럼 네 편인 사람만 있는 건 아니란다. 네 착한 마음을 이용하려는 사람도 있을 수 있어. 잘 모르는 일을 결정할 땐 꼭 아빠랑 의논하렴. 언젠가 너도 아빠 없이 세상과 마주할 날이 오겠지만, 그날까지는 아빠가 네 곁에 있을게.'




* 너무 걱정이 많은가요? 늦둥이 딸바보 아빠라서 그럴지도 모릅니다. 젊은 아빠, 엄마들은 어떠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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