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사진에 사랑을 담으려면

연인 사진작가의 고민

    서른이 시작될 무렵에 아팠다. 진단받을 수 있는 어떤 병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마음이.


    첫 번째 증상은 불신이었다. 사랑이라는 것에 대한. 연인들을 보는 게 힘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는 거짓말 같다고 생각했다. 다들 속으로는 딴생각을 품고 있지 않을까. 그저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연인 관계를 지속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사랑하는 이들을 한 발짝 물러서서 바라봤다. 그런 마음의 병이 몇 년간 꽤 오래갔다.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내가 찍는 사진 중에는 연인 사진도 있었는데 이 병을 드러내면 큰 일 나니까. 하루 종일 공감하는 연기를 하고 집에 오면 녹초가 되곤 했다. 돌이켜 보면 부끄럽다.


    두 번째 증상은 남 탓이었다. 이 글을 쓰면서도 가슴 한편이 저리고 과거의 내가 밉다. 그땐 항상 상대방에게서 잘못을 찾았다. 왜 이런 일이 생기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원망했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게임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상담을 받으면서 알게 됐다. 상대방이 아무렇지도 않게 선을 넘어오는 이유는 내가 그렇게 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란다. 처음부터 가볍게 경고하지 않으면, 한 걸음 두 걸음 넘어보다가 괜찮다고 생각하고 쉽게 선을 넘게 된다고 한다. 교통사고에도 십 대 영이 잘 없듯, 관계에도 백 퍼센트 귀책 상황이란 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만의 잘못도, 상대방만의 잘못도 아니었다.


    물론 한쪽에 확실한 귀책이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최선을 다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 천재지변이 일어서 사고가 난다. 남 탓도 안되고 자책도 안되고 도피해서는 더더욱 안 됐다. 사고를 똑바로 보고 맞서 싸워야 했다.


    어렸을 때는 관계는 영원해야만 하는 줄 알았다. 맺어지면 끊어질 수도 있다는 걸 몰랐다. 짧아도 가치 있는 인연. 꼭 기나긴 인연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걸 놓쳤다. 아파 보고, 그만 아프려고 애를 쓰다가 점차 알게 됐다. 인연의 길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길이와 상관없이 내가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사람 일이라는 게 최선만 다하면 술술 풀리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지만 우리 삶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제각각의 결은 모두 달라서, 영화처럼 사랑하기만 하면 쉽게 맞춰지는 것이 아니다. 이런 부분을 점점 알게 되면서, 지난 일은 어쩔 수 없으니 지금 주위에 주어진 인연들에 더 집중하기로 한다. 그 관계의 길이에 집착하지 않고 나와 그들이 가진 결이 결정할 길이 안에서 최선을 다하기로 한다.


    십여 년이 지나서야 마음의 병이 꽤 나았다. 이제는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봐도 거짓말 같지 않다. 진심으로 응원하게 된다. 사랑하는 분들을 더 잘 찍을 수 있게 됐다.



    저는 신부를 맞이하는 이 자리에서, 참석해 주신 분들 앞에 다음을 서약합니다.

    아침잠이 아내를 짓누르면, 살며시 일으키며 그 무게를 덜겠습니다.

    근무 중 맛집을 발견하면, 아내를 데리고 반드시 다시 가겠습니다.

    늦게 퇴근할 때는 당신 덕분에 오늘을 꽉 채워 살 수 있었다고 감사를 전하겠습니다.

    먼저 퇴근했을 때는 고생할 아내가 좋아하는 쌀밥을 압력밥솥에 지어 기다리겠습니다.

    계절이 바뀌어 벚꽃이 만발하면, 뚝섬으로 꽃구경을 데려가겠습니다. 무더위가 찾아오면 바다 수영을 데려가다 휴게소에서 아내가 좋아하는 카페라테를 사주고, 가을바람이 선선해지면 매봉에 올라 낙엽 구경을 시키겠습니다.
 
    겨울이 온다 싶으면 두꺼운 옷을 싫어하는 아내를 책임지고 꽁꽁 싸매겠습니다.

    그렇게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차곡차곡 함께 보내다가, 문득 허리가 꺾이고 머리가 희어진 날, 손을 꼭 맞잡고 산책을 하겠습니다.

    그러다 아내를 먼저 보내는 날이 오더라도, 함께 산책하던 그 길을 매일 걷겠습니다.


    결혼하며 썼던 혼인서약서다. 결혼 생활은 내게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 사랑은 관찰하며 배우고, 직접 하며 완성되는 것 같다. 어렸을 때 혼자 사랑 잘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을 관찰했다. 그 냄새와 온도. 이제 관찰했던 것을 실천해야 나만의 사랑이 완성된다는 것을 안다.


    혼자 보던 걸 둘이 보고 싶고, 혼자 먹던 걸 둘이 먹고 싶고, 혼자 즐기던 취미를 둘이 함께하고 싶은 마음. 가장 긍정적인 감정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나누면 그 크기가 훨씬 커진다는 사실을 배운다.



    사랑을 배워야 사랑을 찍을 수 있다. 연인 사진 촬영은 그분들이 완성해 나가고 있는 사랑의 이야기가 가지는 색채와 냄새, 그리고 온도에 관하여 그려드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살색이 많은 사진을 찍으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