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거리의 천국
태국에 막연히 가고 싶다고 생각한 건 재작년부터였지만 가야겠다고 다짐한 건 올해 6월쯤이었다. 올해 5월부터 자연식물식을 기반으로 한 식단을 유지하면서 아침식사를 과일로 대체하고, 간식도 과일로 먹으면서 비싼 과일값에도 불구하고 과일 소비량이 엄청 늘었다.
그래서 동남아에 가서 열대과일을 실컷 먹는 게 위시리스트 중 하나였다. 태국은 불교 국가라 채식 인구가 많아서 채식 식당이 많고 그중에서도 치앙마이는 비건 친화적인 도시라 나에게는 꼭 가야 할 여행지였다.
여행 동안 그렇게 많은 과일을 먹었지만 떠날 때가 다가오니 아쉽기만 하다. 먹거리만 생각하면 여기에서 눌러살고 싶은 만큼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을 찾기가 어려웠다. 물론 채식 식당 위주로 다니며 먹었기에 다양하게 먹은 건 아니지만 평소에 먹어보지 못한 많은 음식을 접하고 이번이 아니면 못 먹는다는 생각에 평소보다 더 많이 먹고 다녔다.
아침마다 시장에 다니며 과일을 사 온다. 팩에 든 과일은 걸어 다니면서 바로 먹는다. 숙소에서 과일을 자르기가 어렵기도 하고 놔두면 개미가 꼬여서 잘라 놓은 과일을 주로 산다. 자몽 같은 식감에 좀 더 단맛이 나는 새콤달콤한 포멜로, 바닐라와 두리안 같은 맛이 나는 오묘하고 달콤한 잭프룻, 시원 달달한 용과, 커피맛이 은은하게 나는 파파야... 주로 겨울이 제철인 과일들을 사 먹으니 저렴하고 맛이 좋았다.
여행 출발 전에는 망고를 실컷 먹겠다고 생각했으나 막상 다니면서 많이 먹은 건 파파야와 용과다. 용과 껍질을 바나나 까듯이 쑥 벗겨서 숟가락으로 떠먹으면 부드럽고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들어온다. 한국에서 냉동 과일로 먹을 때 뭔가 심심했던 용과가 현지에서 먹을 땐 너무 달지도 않고 그렇다고 밍밍하지도 않은 적당한 단맛이라 질리지도 않고 계속 들어간다.
특히 파파야는 여행 후반부에 보일 때마다 사 먹고 다녔다. 초록색일 때 주로 쏨땀 재료로 채쳐서 샐러드로 먹고, 겉이 노랗고 살짝 물렁해지면 속이 주황으로 꽉 찬 달콤한 파파야가 된다. 파파야에는 소화 효소인 파파인이 들어 있어 소화작용을 도와주어 여행 내내 속 불편함 없이 다닐 수 있었다.
태국은 어딜 다니든 코코넛으로 파는 간식을 만날 수 있다. 코코넛으로 만든 간식들을 길거리에서 볼 때면 항상 멈춰 서서 꼭 사 먹어 본다. 코코넛 귀신이 들렸다고 할 만큼 코코넛을 먹었지만 아직도 아쉽다. 도대체 얼마 정도 먹으면 이제 질려서 그만 먹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까?
태국의 채식 식당은 노란 배경에 빨간색 글씨로 표시되어 있다. 로컬 식당에는 밥 위에 2-3가지 반찬을 덮밥처럼 올려 먹는 메뉴를 많이 판매하는데 가격이 40바트 정도로 저렴해서 자주 먹었다. 아직도 다 맛보지 못한 반찬들이 많다. 버섯이나 두부, 콩으로 고기 식감을 내서 먹는 재미도 있고 속이 든든하기도 했다.
점심은 주로 로컬 식당에서 덮밥요리나 면요리를 먹는다. 매일매일 새로운 메뉴를 시킨다. 쏨땀이나 다른 샐러드와 함께 먹으면 늘 배부르다. 배부르게 먹고 나와 더운 거리를 걸으면 아이스크림 생각이 절로 난다. 우연히 아이스크림 가게를 마주쳐 코코넛 아이스크림 하나 사 먹으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점심에 과식했다 싶으면 저녁은 간식거리나 과일로 대체한다. 이렇게 먹어도 늘 배부르게 다녔으니 출발하기 전보다 몇 킬로가 늘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파파야 덕분인지 몰라도 여행 내내 배 아프거나 속 안 좋은 것 없이 잘 먹고 돌아다녔다. 나는 먹을 것을 구경하는 것이 제일 재미있다. 내가 먹지 않는 고기가 들어간 음식이라도 노점상에서 어떻게 요리하는지 사람들은 뭘 먹는지 저건 무슨 맛일지 궁금했다. 돌이켜 보면 이번 여행에서 먹는 것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 같다. 사람은 먹어야 에너지를 쓰고 돌아다닐 수 있기에 어쩌면 먹는 것이 가장 삶의 근본이고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번 여행에선 모든 걸 운에 맡기고 욕심을 내려놓자 했지만 먹는 것 앞에서는 번번이 다짐이 무너진다. 과욕을 부려서 더 먹거나 배가 안 고픈 데도 새로운 것이면 사 먹으면서 먹을 것 앞에서 자제가 안 되는 모습을 발견한다. 그동안 눌려왔던 욕구가 이번 기회로 튕겨 오른 것이다. 글을 쓰며 억눌러 왔던 욕구를 돌아본다. 내가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지 가만히 떠올려보는 시간을 가진다.
이제 출국 전까지 한 끼의 식사가 남아 있다. 무엇을 먹을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이니 감사한 마음으로 천천히 그리고 우아하게 맛을 느끼며 마지막 식사를 즐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