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대화하기 XXVI
도올선생의 <노자가 옳았다> 11장을 읽고 쓴다.
11장에 아래와 같은 문구들이 있다.
當其無,有車之用 그 바퀴통의 속의 빔에 수레의 쓰임이 있다.
當其無,有器之用 그 그릇의 빔에 그릇의 쓰임이 있다.
當其無,有室之用 그 방의 빔에 방의 쓰임이 있다.
멋지다. 라임(?)까지 맞춘 듯한 문장들을 보며 나는 위임을 떠올렸다. 當其無의 대상으로 사람들이 함께 일할 때 무엇이 비어야 하는지를 떠올렸다. 지난 10년의 경험이 담겨 있는 깨달음이다.
나는 과거에 최선을 다해 수행했던 다년간의 프로젝트 끝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했다고 느낀 일이 있다.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이었는데, 일정 내에 비교적 잘 만들어냈지만 상실감을 느꼈다. 지속할 수 없는 일이었고, 누구도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방법을 몰랐다. 일을 너무나도 사랑한 나는 지금과 같이 일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퇴사를 했다. 그리고 낯선 인연에 이끌려 2016년 중국으로 향하게 되었다. 지금 내가 읽는 노자 11장을 보니 내 삶에 커다란 허虚가 되어준 시기가 시작했다.
허에 대해서는 11장의 일부 내용 인용으로 설명을 대신한다.
허라는 개념은 물리적 공간성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가지고 있는 잠재적 능력, 그 자정능력의 여유, 그리고 그 여유로 인하여 생기는 창조적 순환을 추상적으로 일반화하여 일컫는 말이다.
책에는 냉장고와 물의 예시를 들어 친절히 설명하고 있으니 더 궁금하신 분은 책(176쪽)을 사서 읽으시거나 차선책으로 도올노자 유투브 허虚, 차면 넘친다 - 허가 없는 상태가 종말이다 시청을 권합니다.
그러한 허가 내 삶에 찾아왔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이렇다. 중국 개발회사의 경쟁력을 높이려고 갔다. 하지만, 내가 아는 방법이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나는 가장 중요한 가치만 뽑아내고 나머지는 모두 버렸다. 일년 후에 합류한 한국인 동료가 조직의 변화에 대해 객관적 시각으로 쓴 글에서 두 가지 초점을 확인할 수 있다.
(사전 작업 하지 말고) 동작하는 코드를 만들어라.
(사용자 피드백을 받고) 다시 개발하라
동료의 글을 다시 보는데 아래 이미지가 있어 놀랍다. 허虚를 표현한 듯하지 않은가?
그림을 보며 나는 중의적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기존의 방법을 버리겠다는 선언이 주는 막막함이다. 중국에 가서 꽤 긴 시간 일상의 긴 시간이 괴로웠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아마 그 이전 한국에서의 삶은 허虚가 부족해서 낯선 허를 채우는 방법을 몰랐다고도 볼 수 있다.
또한, 내 지시를 받은 중국 동료들의 막막함을 위 이미지에서 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뭔가 정하고 논의하고, ERD도 다 그린 후에 프레임워크까지 정하고 개발하던 방식이 몸에 베인 친구들에게 가장 간단한 화면이나 기능만 설명해주고 일주일 동안 짤 수 있는 만큼 만들어서 보자고 했더니 막막해했다. 하지만, 그 막막함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 우리는 우리만의 방법을 찾았다. 그러한 점에서 책 179쪽의 문장은 온몸으로 동의한다.
한마디로 허는 창조성의 근원이다. 허가 있어야 창조가 가능하고 새로움이 가능하고 지속이 가능하고, 상常의 생명력이 유지되는 것이다.
그런데, 허虚의 순간의 왜 그렇게 고통스러웠을까? 나뿐 아니라 동료들 다수가 그랬고, 일부는 끝내 허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들이 원래 하던 방식을 고수했다. 11장 텍스트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다.
인간 문명의 진화는 이 허虚를 빼앗아가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문명은 "허虚"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만滿“을 지향해왔다.
다수의 동료들은 아주 구체적인 계획과 방법을 듣고자 원했다. 그리고, 조금 다른 장면에서 만난 애자일을 거부(?)하거나 싫어하는 사람들도 떠오른다. 내 경험안에서 3명 정도가 강한 거부감을 표현했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대기업 고위 관리자이고, 승진을 빨린 한 사람들이며 명문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다. 그들은 비어있음을 참지 못했다. 그들의 (창의력보다) 효율을 중시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철저한 계획은 창조를 막는다. 계획대로 해야 하기 때문에 창조의 기회가 굉장히 줄어든다. 제조업에서 배운 관리기법은 지식정보를 다루는 산업에서는 독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중국에 가기 전인 2014년 즈음에는 CIO가 운영효율화를 말하면 한물 간 사람이라 말한 일이 있다. 그 생각은 지금도 유효하다.
유위와 무위에 대한 설명이 등장한다.
노자는 허를 없애는 방향에서의 인간의 작위를 "유위有爲“라고 부른다. 그리고 허를 극대화시키는 방향으로의 인간의 노력이나 지혜를 "무위無爲"라고 부른다.
무위는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 단순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무위는 나에겐 의미가 없다. 나에게 의미가 있는 무위 실천법은 아래와 같은 예를 들 수 있다.
공감을 위해 다른 사람의 말을 그대로 듣는다. (충조평판 없이)
불필요한 결정을 하지 않고 기다린다. (애자일)
하지만, 무위의 실천도 쉽지 않았다. 아니 상당한 고통이 따르고 인내를 요했다. 중국에서 팀웍을 북돋는 과정에서 나는 개취인정의 고행을 견뎌냈다. 내가 보기에 바람직하지 않는 행동을 용인하며, 공동의 목표에 초점을 맞추는 어울림의 과정 자체가 팀웍을 만들었다.
또한, 개취인정의 시작은 구체적으로 방법이나 도구를 정하지 않은 허虚에서 비롯한 창조와 창발의 토양에서 시작했다. 참고로 대기업은 창발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니 당연히 개취인정 자체를 거론하기 어렵다. 아무튼 나는 개취인정을 습관으로 배양하는 과정에서 드디어 위임이 무엇인지 배웠다. 위임은 위임받은 이가 개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허虚가 기본이다. (물론, 조직을 위해서는 OKR과 같은 보조 도구가 필요하다.)
나는 아래 문장을 읽으면서 순환, 반복 그리고 애자일 등의 단어를 떠올렸다.
노자가 생각하는 우주는 시작도 없고 종말도 없으며 오직 "생생生生"의 과정Process(=역易)만 있다.
2008년 첫 PM 역할을 맡았을 때, 애자일 프랙티스 적용을 하고 배운 바를 발표한 일이 있다. 아래 장표 초반에 나는 봄/여름/가을/겨울 4계절의 순환을 설명했다. 그때, 어떤 의도로 그런 내용을 넣었는지 기억은 불분명하다. 막연하게나마 반복과 순환의 힘을 연결하려고 노력했을 듯하다.
지금 보니 도올선생이 비판하는 역사의 진보사관Idea of Progress에 대한 탈피가 아닐까 싶다. 당시 나는 진보사관 따위는 몰랐다. 하지만, 성공과 최상을 강조하는 사회 관행에 대해 저항하는 태도를 갖고 있었다. 삶이 계속되는데 성공하면 그 후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에게 성공은 그저 일시적인 목표나 짧은 순간의 만족감에 지나지 않는다. 드라마나 뉴스에 나오는 성공이야기는 인생의 단면을 지나치게 과장한 묘사라고 생각한다. 채워지면 다시 비워야 하고, 그게 빔의 쓰임이다. 그리고, 삶은 죽을 때까지 채우고 비우고를 반복하는 일이 아닌가? 채우고 비우는 과정에서 어떻게 살았고, 그 삶이 어떤 길이라 말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들이 성공에 대한 지향 혹은 역사의 진보사관Idea of Progress보다 훨씬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