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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영회 습작 Oct 07. 2021

지금 어떤 나를 위해 행동하는가?

묻따풀 훈련 No. 7

지난  편을 보면 묻따풀을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나날이 보인다. 지난 에서 최봉영선생님의 식견을 소개한  있다. 아래  가지 말이다.

"저만"을 위하는 나

"저들만" 위하는 나

"남까지" 위하는 나

"것까지" 위하는 나

이 글은 이를 묻고 따지고 풀이하는 글이다.


나는 나를 위해서 살아간다

마침 이 글을 쓰기 전날 최봉영 선생님의 작품(?) '나는 나를 위해서 살아간다'가 발표되었다. 거기서 묻기를 시작해보자.

<나>는 <나>를 위해서 살아간다. 이는 참으로 맞는 말이고, 옳은 말이고, 마땅한 말이다.

묻고 따져 생각을 차릴 기본 단위를 만난 느낌이다.내가 나를 위해 살아가는 여정의 양상과 의도가 다양하게 바뀔  있을텐데, 이때 원소 소인수 역할을  문장이 아닐까 싶다.


인간의 경계 vs. 인간의 굴레

그리고, 인간의 경계를 설명하는 문장이 등장한다.

<내>가 <나>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은 <내>가 본디 그렇게 생겨 먹었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벗어날 수 없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위 문장을 보고  머릿속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는 굴레였다. 뒤이어 ‘굴레는 부정적이니 경계’ 하며 대안이 등장(?)했다. 구글링 하여  표현을 비교했다.  페이지 결과는 이렇다. 우선 인간의 경계 인간의 굴레보다 검색결과가 10배나 많다.

근데, 굴레가 무슨 뜻이지? 정확히 어떤 사물인지 모르고, 느낌으로만 아는 단어다. '굴레를 벗어나' 는 매우 익숙하지만... ㅡㅡ^


이미지 검색 결과에서  번째 눈에  것은 아래 이미지다. 사물을 찾을 때, 나는 식별이 빠른 이미지 검색을 주로 쓴다. 소에게 씌우는 굴레 (몰랐지만)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내가 알고 있던 굴레의 느낌과 유사한 사물이다.

출처: 구글 이미지

반면, 여성에게 씌우는 굴레 다소 충격이었다. 이미지 들어있는 설명에는 상류층이라는 표현이  있다. 굴레라는 말과 상충하는 인상이다. 최근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 관련 소식을 들을  등장하던 이슬람이 여성을 가두는 복장과 유사하다.

출처: 구글 이미지

암튼, 최선생님의 문장으로 돌아가 자. 인간의 굴레라 하든 경계라고 부르든  차이는 없을 듯하다. 문장의 의미 파악에 영향을 주기 보다는 읽는 사람의 심리상태(혹은 경험) 투영으로 ‘굴레’ 혹은 ‘경계’ 중 하나의 느낌을 갖지 않을까 싶다.


나의 4가지 계층(layering)

이 글이 등장하는 맥락이 되는 바로 그 내용이다. 최선생님께 이미 들은 내용이라 감탄하면서 보는데

<내>가 <나>를 위해서 살아갈 때, <내>가 위하고자 하는 <나>는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네 가지로 갈라져 있다. 사람들은 이것을 또렷이 깨쳐야만 <내>가 <나>를 <나>답게 만드는 길로 나아갈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나>밖에 모르는 어리석음에 빠져서 살아가야 한다.

 가지로 갈래치는 일은, 나에게 익숙한 소프트웨어 설계 기법인 계층화(Layering) 호출했다. 머릿 속에서 '이거, 레이어링과 똑같네' 라고 하고 있었다. 레이어링   중요한 점은 바로 특정 흐름(HTTP Request  호출) 인식/묘사할  그것이 다루는 계층이 어디인지 분명하게 하는 것이다. 최선생님도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나의 행위(혹은 생각) 지금 (4 계층 중에서) 어떤 나인지 분명하게 인식하라고 강조한다.


이기주의, 집단주의, 보편주의, 존재주의

뒤이어 명료한 구분과 함께 이름을 붙여주셨다. 이름은 좋은 것이다!

첫째로 <나>는 <저만> 위하고자 하는 <나>를 위해서 살아갈 수 있다. 사람들이 이런 <나>를 좇아서 살아가고자 할 때, 그것을 "이기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둘째로 <나>는 <저들만> 위하고자 하는 <나>를 위해서 살아갈 수 있다. 사람들이 이런 <나>를 좇아서 살아가고자 할 때, 그것을 "집단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셋째로 <나>는 <남까지> 위하고자 하는 <나>를 위해서 살아갈 수 있다. 사람들이 이런 <나>를 좇아서 살아가고자 할 때, 그것을 "보편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넷째로 <나>는 <것까지> 위하고자 하는 <나>를 위해서 살아갈 수 있다. 사람들이 이런 <나>를 좇아서 살아가고자 할 때, 그것을 "존재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나는 대체로 보편주의를 지향한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나를 이상주의자라 지적(?)했지만, 도리어 나는 '이상주의' 아니라고 변명한 일이 많다. 현실에서 그걸 해내는데  이상주의라고 할까? 지금보니 ((내가 아는) 이상주의가 아니라 (최선생님이 말하는)보편주의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종종 이기주의나 집단주의자처럼 행동하긴 하지만, 일시적인 감정이나 이해관계에 대해 그렇게 반응할뿐 주의라고  정도로 그러한 입장을 하지 않는다. 또한, 존재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다.  부분에 대해서는 인식과 공감이 (인간을 대하는데 비해) 현격하게 부족한 탓이다.


나에 갇힌 삶과 성취

아래 표현에서 갇혀서라는 문구가 있어서 또 다시 굴레가 떠오르지만, 농기구나 의복의 굴레와 비교할 바는 아닌 듯하다.

사람들은 말로써 생각을 펼칠 수 있기 때문에 <저만>을 위하는 <나>를 넘어서, <저들>을 위하고, <남들>을 위하고, <것들>을 위하는 <나>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나>의 바탕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잘 알지 못하는 까닭으로 죽음에 이를 때까지 <저만> 또는 <저들만> 위하는 <나>에 갇혀서 살아가게 된다.

나는 먼저 최선생님이 그리신 말과 문명 세계와 자연 세계라는 파문 그림이 떠올랐다. 갇힌 임자의 인식에서 나온 말이 생각으로 펴져나가서 임자를 벗어나 많은 것들을 만들어낸다.

그런 의미에서 갇혔다는 사실이 굴레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에 대한 느낌을 세밀하게 갖는 데에는 막역한 지인이 최선생님 페북 글에 단 댓글이 상당한 도움을 줄 듯하다. 아래 그림에서 찾아보시길...

그렇다. 우리는 남과 같을 수는 없지만 같이 살 수는 있다. 물리적으로 같을 수는 없지만,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같은 목표를 함께 할 수 있다. 그리고, (거의) 같은 행동응 할 수도 있고…


큰 나인 우리로 더불어 사람답게

묻따풀을 모를  아니 최봉영 선생님의 존재를 알기 시작할 즈음에  글이 있다. 제목이  나인 우리로 더불어 사람답게 이다.  글을 보면, 내가 여기(?)까지 오게  배경을 짐작할  있다. 비록  글이 독자를 배려해서  글은 아니지만, 독자님들도  글에서 용기를 얻어서 펜을 들고 메모(혹은 낙서) 하며 스스로 묻고 따져보시길 랍니다. 그리고 나서 기는 의문은 언제든 브런치나 페이스북 댓글로 주세요. 어떤 내용이든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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