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따풀 훈련 No. 6
욕망에 대해 묻고 따지는 일은 내 일상 중에 아주 작은 시간을 할애하는 일이다. 하지만, 긴 시간 루틴으로 자리 잡으면 삶에서 혁신을 만들어낸다. 굳이 혁신이란 단어를 쓴 연유는 최근 인상 깊게 읽은 HBR 기사를 기억/공유할 의도가 섞여 있다.
대개 획기적 혁신은 무질서하고 무작위하며 통제 불가능한 맥락에서, 다시 말해 순전히 운이 좋아서 혹은 불세출의 천재가 영감을 받았을 때 탄생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틀렸다. <중략> 혁신이란 자연 세계의 진화의 법칙을 바탕으로 수립한 정교한 프로세스에서 탄생하는 것이라는 공통의 결론에 도달했다.
예를 들어, 욕망과 거품에 대해서를 쓰고 나서 지인의 페북글에서 거품을 암시하는 표현이 있었음을 기억해낸다. 거품이라는 말은 없지만 '적당한 선을 진작 오버한 상태로 내면에 들끓어올라' 라는 지인의 표현을 거품이라는 은유로 충분히 대치할 수 있다. 글을 쓰고 공유하면 피드백을 받기 쉬운 상태가 된다.
자 이제 지인에 받은 피드백을 음미해보자. 그는 욕망은 공동체를 파괴하기 충분하다고 말한다. 최봉영선생님의 도식에 등장하는 도덕규범과 사회체제를 감각하고 있다 할 수 있다. 이런 우연(?)이라니, 놀랍고 흥미롭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욕망을 스스로 물으면서 최선생님 도식에 담은 내용을 인지할 수 있던 지인이 내가 쓴 묻따풀 시리즈에 대해 논문같다 평했다. 그리 판단한 이유를 몇 가지로 유추해볼 수는 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그 일을 내가 소환하는 이유는 묻따풀 활동을 하는 계기를 스스로 반추하고, 명확하게 하기 위함이다. 사실 끌림에 의해 하는 활동이라 직접적인 동기가 있다고 할 수 없다. 근래의 사건은 상관관계가 있을 뿐, 분명한 인과과계가 있다 하기 어렵다. 나는 삶이 그러한 연속으로 이어진다고 믿는다. 하지만, 나에게 벌이진 일 모두를 그저 우연이라 치부하기에는 일관성을 이루는 부분이 드러나긴 한다. 과거로 기억을 돌려 긴 시간흐름으로 보면 어떤 끌림에 대해 내가 내린 선택이 하나의 흐름으로 나타난다.
욕망에 대한 탐구II에서 인용한 고미숙선생님과는 개인적인 인연이 있다. 2015년 아주 우연한 계기로 그 분의 명리학 강의를 직접 들은 일이 있다. 놀라운 사실은 당시 나는 '명리학'이 무엇인지도 몰라고, 고미숙선생님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선착순이라고 해서 빨리 신청했다. ㅋㅋㅋ
그때 들을 말 중에 단번에 뇌리에 박힌 말이 '생활지'라는 표현이다. 듣자마자 내가 추구하던 지식이었다. 일상 활동을 통해 배우고 써먹을 수 있는 지식. 고미숙선생님의 정의 자체에 대해 받아들였다기 보다 내가 믿었던 가치 있는 지식에 대해 부르는 말이 없었는데, 선생님이 이름을 알려준 듯한 느낌이었다.
암튼, 페친인 지인이 말한 '논문'에 함의와 달리 내게는 '논문은 통상 생활지를 다루지 않는다'는 느낌(혹은 편향)이 있다.
생활지라고 부르지는 못했지만, 내가 그런 식으로 지식을 익히고 활용한 계기는 분명했다. 대학을 졸업할 즈음 나는 프로그래머로 소프트웨어 공학에서 추구하는 바를 실천하려고 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건 불가능하다고 했다. 반골기질이 있었는지 나는 더욱 열심히 '그건 안된다'고 하는 방향으로 내 길을 만들었다. 10년 정도 쭉 그랬다. 컨설팅 회사에서는 '그건 이론으로나 가능해' 라고 하면, 나는 직접 개발까지 해서 증명했다. 그렇게 살다보니 나는 내가 배운 소프트웨어 공학 지식을 응용해서 세상사를 푸는 방법도 익혔다. 너무 많아 몇 개만 대충 요약하면 이렇다.
요구사항 분석에서 배운 이해관계자가 파악을 응용해 그가 놓인 맥락을 보는 법 (사내 정치의 이해)
느슨한 연결(loosely coupled)이 바로 조직의 유연성을 잃지 않으면서 확장할 수 있는 원리란 점
인터페이스 구현원리(Dependency Injection)가 각자 잘하는 분야에 초점을 맞추면서 시너지를 내는 기획사의 구성과 비슷하단 점
암튼, 향후 생활지에 대한 지향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는 내 삶의 여정에서 인지할 수 있는 동력은 두 가지다. 하고 싶다는 강한 욕망 그리고 그렇게 하면 굶는다고 지레 겁을 주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믿음(통념)에 대한 반발이다.
다시 생활지라는 말을 처음 듣던 2015년으로 가보자. 생활지라는 말과 함께 나는 명리학(사주팔자)과 같이 과거의 나로써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비합리적인 지식체계도 받아들여 써먹기 시작했다. 대략 70명 정도 지인들의 사주를 봐주며, 그들의 반응과 내가 사람에 대해 배우는 바를 취미처럼 즐겼다. 그 과정에서 다시 내가 배운 바는 나를 규정하는 틀을 벗어나는 방법이었던 듯하다. 일(개발, 설계, 컨설팅) 말고는 관심을 닫아 버리는 나를 극복해왔는지도 모른다. 암튼, 그런 새로움을 장착한 상태로 5년 여의 시간을 보내던 중에 다시 아주 우연하게 묻따풀을 만났다.
그리고, 방금 페북에서 내가 묻따풀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던 흔적을 찾으려고 시도했다가 (찾지 못하고) 발견한 그림은 소름을 돋게 한다. 중국에 가서 (다시) 한자를 익혀야 할 때, 공부(功夫)라는 한자가 '힘쓸 공'과 '지아비 부'의 조합으로, 몸을 써서 힘들게 익히는 행위란 뜻을 처음으로 알고 함참을 감탄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5년의 시간 점선처럼 약한 관심사로 내 삶에 이어져오던 끌림은 나를 묻따풀로 이끌었는지도 모른다. (결과는 나중에 알겠지만)
즉흥적인 글쓰기라 다소 횡설수설했지만, 내가 묻따풀을 왜 하는지 적어도 내 삶의 틀 안에서는 대충 정리가 되었다. 암튼, 이렇게 생활의 일부로 장착하며 앞서 말한대로 작은 사건이 또 묻따풀 결과를 자극한다. 아래는 최근에 한 페친님 글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여기 욕망이란 말을 쓰여 있지 않지만, 욕망이 내 몸과 삶의 틀을 벗어나면 해롭다는 메시지는 유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