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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영회 습작 Sep 10. 2021

욕망에 대한 탐구 II

묻따풀 훈련 No. 2

욕망에 대해 탐구하기 첫 시도는 욕망에 대한 정의에서 출발하여, 주변 지인의 쓰임과 최근 내 관심이 머물고 있는 욕망 대신 비움을 추구하여 균형을 추구하는 일로 글이 흘렀다. 애초에 메시지가 분명한 글이 아니고 묻고 따져서 풀어내는 훈련이기에 독자님들께는 다소 모호한 글에 그칠 수 있다.


이번 글은 묻따풀 학당에 오른 글에 기초해서 욕망에 대해 묻고 따져본다. 


욕망의 생산자인 임자

사피엔스가 다른 동물들과 구분되는 지점을 설명한다. 유발하라리의 사피엔스에서 배운 내용인데, 임자란 표현이 독특하다.

사람들은 언제부터인가 말로써 생각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나비, 멸치, 상어, 돼지, 고래, 침팬지와 다르게 문화와 문명의 임자로서 살아가게 되었다.

임자에 대한 묻따풀 학당의 임자 정의는 아래와 같다.

한국사람은 이것과 다른 것이 함께 할 때, 함께 함의 잣대가 되는 이쪽이 나름의 줏대를 갖고서 다른 쪽과 함께 하는 경우에, 나름의 줏대를 가진 이쪽을 ‘임자’라고 부른다.

주체가 되는 '이쪽'에서 줏대를 가진 쪽을 임자라 부른다. 국어사전을 보면 세 가지 풀이가 있는데, 첫 풀이는

물건을 소유한 사람이다. 사전과 묻따풀의 정의는 사뭇 다르다. 사전은 결과적으로 이런 의미가 되었음을 알게 되나 묻따풀의 정의는 묻고 따지는 과정이 담겨 있다.


다시 인용한 첫 문장으로 돌아가면 주의할 사항은 사람이 문화와 문명의 임자라는 점이다. 문장놀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면 상상의 산물이 축적되어 만들어진 결과물이 문화와 문명이니 인간이 임자라는 주장이 성립한다. 반면에,  나는 어릴적에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주장을 자주 들었는데, 들을 때마다 매우 거부감이 들었다.


생각난 김에 검색해봤더니 여전히 그런 주장을 하는 칼럼이 있다. 읽어보면 영성에 대한 주장을 할 수는 있으나 만물과 관계에 대해서는 매우 설명이 빈약하다. 박문호박사님이 설명을 통해 듣는 만물의 공진화(시간을 두고 함께 공존하는)를 듣다보면 이런 칼럼이 얼마나 무지하고 허무맹랑한 주장인가 싶다. 극심한 환경파괴에 의해 ESG가 회자되는 상황을 보면서 만물의 영장 운운하는 일은 시대착오적 답습이 아닌가 싶다.


하고 싶음과 되고 싶음을 말에 담기

각설하고, 묻따풀 학당의 다음 문장을 보자.

사람들은 말로써 생각을 펼치게 되자, '하고 싶음'과 '되고 싶음'과 '답고 싶음'에 대한 생각을 말에 담아서, 어떤 것을 바라거나 이루는 보람으로 삼게 되었다. 사람들은 '하고 싶음'과 '되고 싶음'과 '답고 싶음'에 대한 생각을 말에 담아서, 어떤 것을 바라거나 이루는 보람으로 삼는 것을 ‘욕망(desire)’이라고 부른다.

지난 글에서 최선생님과 통화 중에 그린 그림이 떠올랐다. 욕구를 생각이나 말에 담으면 욕망으로 전환된다.

욕구와 욕망을 구분할 수는 있으나 말로써 생각을 내뱉는 순간 모두 욕망이 된다. 오늘도 대화를 하면서 욕구와 욕망을 섞어 쓰면서 찰나의 갈등을 했는데, 묘한 해방감도 생긴다. 사실 대화 중에서 두 말의 차이가 소통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겠구나 싶었다.


욕망이라 부르는 것의 특징

지금까지 쓴 글을 보니 욕망이라는 단어 하나만 갖고 혼자서 묻고 따져본 글보다는 확실히 구조적이다. 그런데, 묻따풀 학당의 이후 문장이 너무 길어 그대로 인용하면 구조적 흐름이 깨질 듯하다. 그래서 네 번째(04)로 묶인 구절은 요약을 시도한다.


욕망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특징을 갖는다.

말로써 생각을 펼치는 일에 바탕을 둔다

사람들을 이끈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다

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은 욕망'과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과 '어떤 사람답고 싶은 욕망' 등의 세 가지 형태를 띈다.

이상의 특징 구분에 따라 인용을 해서 구조화를 하고, 내 생각을 덧붙여 보자.


욕망은 말로 생각을 펼칠 수 일

욕망을 갖을 수 있으려면 말로 생각을 펼칠 수 있어야 한다.

첫째로, 욕망은 사람들이 말로써 생각을 펼치는 일에 바탕을 두고 있다. 말로써 생각을 펼치는 일을 할 수 없는 것은 욕망을 가질 수 없다. 이런 까닭으로 갓난아기, 나비, 멸치, 상어, 돼지, 고래, 침팬지와 같은 것은 욕망을 가질 수 없다. 이들은 어떤 것을 느껴서 알아보는 일에 바탕을 두고 있는 지각과 욕구 단계에 머물러 있다.

앞서 사람이 문화와 문명의 임자라 설명한 부분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렇게 펼친 생각으로 스스로를 이끌고, 다른 사람을 이끈다.

둘째로, 욕망은 사람들이 어떤 것을 바라거나 이루는 보람으로서, 사람들이 몸과 머리와 마음을 쓰도록 이끈다. 사람들은 욕망에 이끌려서 끊임없이 몸을 놀리고, 머리를 굴리고, 마음을 졸이는 일을 한다. 사람들은 죽음에 이를 때까지 언제나 늘 욕망하는 일을 그치지 않는다. 이런 까닭으로 사람들이 이러한 욕망을 제대로 추스리지 못하면, 갖가지 욕망들에 눌리고, 깔리고, 치이고, 부대끼는 일을 겪게 된다.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주장하는 일도 다른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쓰도록 이끄는 행위의 하나다. 즉, 말로 자기 생각을 담은 욕망의 표출이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욕망을 멈추지 않기 때문에 의식적인 비움이 없으면 욕망이 도리어 나에게 해로울 수 있음을 다룬 다른 배움을 지난 글에 인용한 바 있다.

최근에 가족들과 정신병에 걸린 지인에 대해 몇 차례 이야기 한 바 있다. 요즘 주변을 보면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까지 포함하면 정신 질환에 가까운 행동을 보이는 이들을 꽤 많다. 욕망을 제대로 추스리지 못하여 발생하는 일이라 볼 수 있다. 문제를 인지해야 해결할 수 있듯이, 자신의 욕망 자체를 인지하는 일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다.


욕망은 모든 생각을 담아내는 그릇

그릇이라는 비유는 또 다른 영감을 부른다. 그릇이 바로 욕망의 임자인 사람이다. 다시 말해 욕망하는 자신이 그릇이다.

셋째로, 욕망은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다. 사람들은 생각이 미칠 수 있는 것이면 있는 것과 없는 것에서부터 아는 것과 모르는 것, 되는 것과 안 되는 것, 하는 것과 못하는 것에 이르는 모든 것을 욕망이라는 그릇에 담아낸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생각이 미치는 것에 기대어서 ‘날아가는 코끼리’, '화성에서 온 사람', ‘끝없이 즐거운 나날’, ‘죽은 뒤에도 살아 있음’,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어떠한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삶’, ‘모든 것을 온전히 이룬 사람’과 같은 것으로 끝없이 욕망을 부풀려 나갈 수 있다. 사람들이 이처럼 부풀려진 욕망에 갇혀서 오고가는 일을 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면, 개나 돼지보다 못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다.

만일 그릇에 못하는 것, 안 되는 것을 담으면 임자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 즉, 스스로 자신을 해롭게 할 수 있다. 반면에 없는 것을 꿈꾸는 일이 창작을 부르고, 모르는 것을 욕망하는 일이 배움의 동기가 될 수 있다. 욕망의 결과물이 무엇이 되는지는 결국 임자에 달려있다. 이 경우 임자란 말이 꽤 잘 어울린다. 자주 쓰니 입에 붙는 듯도 하고.


욕망의 세 가지 모양

묻따풀 학당에서는 그릇에 담기는 욕망의 모양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었다.

넷째로, 사람들이 갖고 있는 욕망은 크게 세 가지, '어떤 일을 하고 싶은 욕망'과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과 '어떤 사람답고 싶은 욕망'이 있다.

첫 번째 욕망은 욕구와 욕망 구분이 불분명한 원초적 욕망들이란 생각이 든다. 내가 주체가 되어 무언가 하는 욕망이다.

사람들은 말로써 생각을 펼칠 수 있게 되면, 누구나 ‘어떤 일을 하고 싶은 욕망’을 갖게 된다.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고 싶은 욕망을 바탕으로 낱낱의 어떤 일을 바라거나 이루는 일을 하게 된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배가 고프면 먹는 일을 하고 싶어 하고, 잠이 오면 자는 일을 하고 싶어 하고, 마음이 심심하면 노는 일을 하고 싶어 한다.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욕망을 바탕으로 삼아서, 갖가지로 일을 바라거나 이룬다.   

행위를 하면 임자의 상태가 바뀐다. 욕망이 행동이 아닌 상태를 지향할 수 있다.

사람들은 낱낱의 어떤 일들을 바라고 이룰 수 있게 되면, 그것을 바탕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을 갖게 된다. 사람들은 먹고, 자고, 놀고, 짓고, 만들고, 따르고, 부리고, 읽고, 쓰는 것과 같은 낱낱의 일을 할 수 있게 되면, 학생이 되고 싶어 하고, 어른이 되고 싶어 하고, 어버이가 되고 싶어 하고, 부자가 되고 싶어 한다. 사람들은 되고 싶음을 바탕으로 삼아서, 어떤 사람이 됨으로써, 어떤 사람의 구실을 하게 된다.

상태는 시간을 기준으로 누적치가 될 수 있기에 행동에 비해 복합적인 점을 인지한다. 세 번째 욕망은 더욱 복합적인 사람구실을 다룬다. 아래 인용문은 특정 상태를 바라는 욕망이 아니라 바람직한 상태를 지속하는 욕망을 뜻하는 듯하다.

사람들이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것은 낱낱의 일을 바탕으로 삼아서, 누가 어떤 사람이 되어서, 어떤 사람으로 구실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이를테면 누가 군인이 되어서 군인으로 구실하게 되면, 그는 군인인 사람으로서 살아가게 된다. 그런데 군인인 사람이 잠을 자거나 빵을 먹는 것은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고, 개나 돼지와도 다르지 않다. 그는 군인으로서 구실하게 될 때, 군인인 사람이 된다.

이쯤에서 인용에만 의존하지 않기 위해 한 차례 생각을 정리해보자. 생각을 차려보자. 욕망의 세 가지 모양은 간단히 말해 행동, 상태, 사람구실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묻따풀학당의 이후 부연은 별도로 제목을 붙여 다뤄보자.


어른과 사람다움

묻따풀 학당에 따르면 한국 사람은 스스로 사람 구실을  해내는 이를 어른이라고 말한다고 한다.

한국사람은 누가 어떤 사람이 되어서, 사람의 구실을 스스로 해낼 수 있을 때, ‘어른’이라고 일컫는다. ‘어른’의 옛말은 ‘얼운이’인데, ‘얼운이’가 ‘얼운’으로 바뀌고, ‘얼운’이 다시 ‘어른’으로 바뀌었다. ‘어른’은 ‘이미 얼운 사람’으로서, 누가 어떤 사람이 되어서, 이쪽과 저쪽을 하나로 얼우는 구실을 스스로 해낼 수 있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반면에 ‘어린이’는 ‘아직 얼이는 사람’으로서, 이쪽과 저쪽을 하나로 얼우는 구실을 스스로 해낼 수 없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어른은 다소 모호하게 써오던 말이다. 만 20세에 도달한 성인을 부를 때 썼다가 '어른스럽다/스럽지 않다' 라고 말할 때는 다른 뜻으로 썼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정의하지 않고 썼는데 스스로 사람 구실을  해내는 이란 정의는 명쾌하다. 게다라 사람 구실은 기억하여 반추하고, 그에 따라 몸에 익히기도 쉽다. 단순히 정의가 명쾌하다 이상의 의미를 지닐 듯하다. (얼우다에 대한 의문은 스킵한다.)


다시 사람구실 혹은 사람다움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다. 어떤 사람에게 따른 일을 다 한다는 설명이 인상깊다. 자연스럽게 또 '임자'란 표현을 떠올린다.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되어서, 어떤 사람으로 구실하게 되면, ‘어떤 사람답고 싶은 욕망’을 가질 수 있다. 이때 사람들이 어떤 사람답고 싶다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 따르는 일을 다 하고, 다 이루어서 온전하게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누가 아버지가 되어서, 아버지에게 따르는 일을 다 하고, 다 이루면 아버지다운 사람이 될 수 있다.

또한, 아래 설명은 사람이 놓은 우리 삶의 특징을 잘 포착한 설명이다. 끊임없는 변화라 섞임이 지속하는 모습 말이다. 지난 글에 소개한 모든 것이 지속이다 유튜브 영상이 떠오른다.

그런데 사람들이 사람답게 되는 일은 어느 하나의 일로써 마무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다 하고, 다 이루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이런 까닭으로 사람들이 사람답게 되는 일은 사람답고자 하는 마음가짐에 바탕을 두게 된다. 한국사람은 이러한 마음가짐을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지”라고 말해왔다.

그래서, 사람답고자 하는 마음가짐을 구현하기 위해 많은 경전에서 비움을 말한다. 그리고, 자연의 순환은 우리에게 무언가 가르치고 보여주려는 듯하다.

한국사람은 사람다움에 대한 욕망이 매우 뜨겁다. 사람들은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보고자, 온갖 일에 힘을 쏟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람’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다움에 대한 욕망이 이리저리 빗나가서 보람을 가질 수 없는 일이 된다. 이런 까닭으로 사람들은 ‘사람’이라는 말이 ‘살려서 살아가는 일’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과 ‘사람이 살려서 살아가는 일’이 ‘사는 일’과 ‘살리는 일’을 하나로 어우르고 아우르는 일이라는 것을 깊고 넓게 깨달을 수 있을 때, 사람다움에 대한 열망을 온전하게 이루어나갈 수 있다.

나는 위 글을 읽고 코로나 상황에서 우리나라의 높은 질서의식을 떠올렸다. 그리고, 촛불시위를 했던 시민들, 그리고 공정과 페미를 말하는 구호 들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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